스무 가지 장벽이 있고, 서른 가지가 발목을 잡는다 해도 가야 할 길이었다. 그곳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다짐했다. 오후 5시 정각 퇴근하여 5시20분쯤 집에 차 대 놓고 이것저것 준비하여 5시30분쯤 출발하리라. 석갑산! 준비랄 것도 없다. 옷 갈아입고 물병 하나 챙기고 이어폰만 귀에 꽂으면 끝이다. 하루 종일 설레었다. 어렴풋이 생각해 보니 지난 해 이맘 때 석갑산, 숙호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걷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봄꽃을 보며 향기에 취해도 보고 꽃샘추위를 만나 콧물을 질질 흘리기도 했다. 지난 한두 달 동안 온몸이 찌뿌드드하여 한의원을 찾게 된 것은, 어쩌면 동네 뒷산이 부르는 신호였는지 모르겠다.

처음 무엇이 발목을 잡는다. 오후 5시 정각 컴퓨터를 끄고 차 열쇠를 집어드는데 전화가 울린다. 5시 3분이다. 보통 때면 동료 직원도 있고 학생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무시한다. 나를 찾는 전화가 아닐 수도 있으니. 오늘은 그들 모두 학교 바깥 행사 지원 나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인다. 다행히 전화벨은 너덧 번만에 그친다. 중요한 전화는 아닐 것이다. 미안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다.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아침에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체국 보험이 두 달 연체되어 이 달 말까지 밀린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실효된다고 하니 꼭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체국은 개양에 있다. 대학 교정 안에도 우체국은 있지만 거긴 금융업무를 하지 않는다. 희망교로 냅다 달려가야 시간을 줄이는데, 개양으로 가면 10분 정도는 늦을 텐데, 굳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거미줄처럼 얽힌다. 하는 수 없이 개양으로 간다.

개양에 우체국이 있다, 고 알고 있는데 없다. 가호동주민센터 옆에 나란히 있었던 우체국이 안 보인다. 아, 그러면 시내 우체국까지 가야 하나? 그러면 오늘 석갑산은 글렀다. 그나저나 우체국은 언제 어디로 갔지, 차라리 잘됐네, 차를 어디서 돌리나…. 생각하며 주변을 서성이는데 우체국이 보인다. 옆옆 건물로 이사한 것이다. 할 수 없군. 우체국엘 간다. 밀린 아내의 보험료 석 달치를 낸다. 잔돈을 받고 자동차로 돌아온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가면 5시30분엔 주차할 수 있겠군. 두 번째 관문도 넘어섰다.

다시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장갑 한 짝이 보이지 않는다. 몇 해째 끼던 겨울용 검정색 가죽장갑이 어디로 갔을까. 분명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우체국에 두고 왔나, 아니 사무실에서 아예 가져오지 않았던 건가…. 모르겠다. 아깝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까, 어차피 새 장갑이 하나 더 있으니, 아니다, 그래도 길바닥에 떨어진 걸 누군가 밟고 지나가거나 자동차 바퀴가 짓이기면서 지나가는 건 불쾌하잖아. 우체국에 다시 가 보자. 차에서 내린다. 왼쪽 바지 주머니에 장갑 한 짝이 있다. 오른쪽 한 짝은 외투 윗주머니에 있었는데…. 지금부터 신호 잘 받고 달려가면 5시 35분쯤엔 주차할 수 있겠군. 세 번째 장애물도 어렵사리 통과했다.

개양오거리에서 석류공원 방향으로 겨우 틀었는데 윗분의 전화가 온다. 받지 않을 재간이 없다. 내일 오전에 무슨 행사가 있는데 축사 원고를 써 달라고 ‘부탁’한다. 보통 이런 전화를 받으면 차를 돌려야 한다. 잘 썼든 못 썼든 밤 안으로 원고를 넘기는 게 아랫사람의 도리인 줄 안다. 하지만 아침 다짐이 하루종일 몸과 마음을 달뜨게 하였으므로 짐짓 용기를 낸다. “내일 아침 출근하시면 원고를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네 번째 허들도 넘었다.

연암공업대학교 앞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오늘 당장 넣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루 정도는 더 견딜 수 있었지만, 언제 어디로 달려가야 할 지 모르는 인생은 미리 준비할 게 많은 법이다. 아내도 무시로 차를 끌고 나가는 판이니. 스스로 기름을 넣고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줄 서지 않는 게 어디랴 싶었다. 조금 속도를 내어 달려가면 5시40분쯤엔 주차하고 출발할 수 있겠다 싶다. 새벼리 지날 때 네비게이션이 띵똥띵똥 소리를 낸다. 머릿속엔 온통 석갑산만 가득했으므로 그냥 지나친다. 며칠 뒤 속도위반 딱지가 올지 말지 모르겠다.

망경동을 지나 천수교를 건너고 나불천 복개도로를 끼고 돌아 공설운동장 곁을 지난다. 길가에 빈 종이상자를 주워 모으는 할머니의 손수레가 서 있다. 맞은 편에서는 버스가 달려온다.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손수레를 들이받거나 맞은편 버스와 정면 충돌하게 생겼다. 급정거한다. 이번엔 블랙박스가 띵똥한다. 누군 몇 초가 아쉬운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세상 일상은 그저 물 흐르듯이 흘러만 가고 있다.

늦어도 오후 5시30분에서 40분 사이에 집에서 출발하려는 데는 까닭이 있다. 동지 지난 지 두 달 넘었으니 해가 제법 길어지긴 했지만 어두컴컴한 산길을 혼자 걸을 엄두가 나지 않은 때문이다. 가뜩이나 크게 결심한 오늘같은 날 하필 구름이 잔뜩 끼어 보통 때보다 더 일찍 해가 질 것 아니겠는가. 5시40분에 출발하면 해 떨어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하산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늦으면 플래시를 갖고 가야 할 판이다. 그래서 마음이 이렇게 조급해진 것이다.

집 앞에 차를 대고 집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을 차례다. 옷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입었던 검정색 스웨터를 오늘 한번 더 입고 세탁기에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어디로 갔을까. 하는 수 없이 모자 달린 스웨터를 찾아 입는다. 모자 쓰고 장갑 끼고 나서려다가, 아뿔싸! 아무리 그래도 물은 한 병 들고 가야겠지. 아침에 작은 물병도 봐 뒀지. 한데 물병이 또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치워버린 것일까. 그냥 갈까, 아니지, 아파트 입구 가게에서 한 병 살까, 아니지, 어디에 있겠지…. 왔다 갔다 하다가 밥솥 뒤에 처박힌 물병을 찾아냈다. 이제 출발이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 호주머니가 허전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엔 단골 국숫집 ‘숙자네’에서 오랜만에 따뜻한 멸치국물에 국수 한 그릇 말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데, 지갑을 두고 나왔다. 그것참! 다시 올라온다. 이번엔 지갑이 안 보인다. 분명 낮에 입고 있던 양복바지 뒷주머니에 있었는데, 어디로 간 걸까.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제대로 챙기지 않는 것인가 보다. 그럼 빨리 영수증을 찾아 주유소에 연락해야지. 영수증은 어디 있지? 지갑에 넣었지. 아이구나! 혹시 차 안에 뒀을까. 열쇠를 들고 쫓아내려가 본다. 차 안에도 지갑은 없다. 그냥 갈까, 국수 안 먹으면 되지, 아니지, 그래도 지갑은 찾아야지, 아니지, 어디에 있겠지, 아니지, 집을 한 번 더 뒤져보자. 다시 집으로 올라와서 이 방 저 방을 가 본다. 심지어 아들방에도 들어가 본다. 시계를 보니 5시55분이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지갑을 찾았다. 옷 갈아입을 때 양복바지 뒷주머니에서 미리 빼 둔 것이다. 까먹지 않고 등산바지 주머니에 넣으려고.. 그래놓고는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아둔하고 멍청한 것으로 치자면, 지금까지 책 읽고 글 써서 밥벌이해 온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귀신이 씌어도 유분수고 정신이 외출했대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혼비백산 우왕좌왕해 가면서 산에 가야 할 까닭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산에 가야 할 까닭은 백만 가지가 넘는다. 지난 해보다 얼마나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모든 게. 지난 해 피던 봄꽃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잘 피어날지 걱정이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을 용케 잘 버티었는지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흙은 그대로 있는지, 사람들은 여전히 오르내리고 있는지 눈앞에 삼삼하다. 꼭대기에 있던 철봉과 훌라후프와 긴 의자와 각종 운동기구들은 녹슬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탱자나무 가시 사이로 헤집고 다니던 참새들은 아직도 거기서 짹짹거리고 있을지 귓가에 쟁쟁하다. 판문동 진양호 쪽으로 넘어가던 해가 비춰주는 황금색 빛살도 그립다. 지난 해 늦가을 발길을 끊은 지 서너 달 동안 석갑산, 숙호산, 판문산 들은 흙을 고르면서 숨을 고르고 나무를 키우면서 뜻을 키우고 물을 흘려보내면서 수많은 사연과 한숨을 흘려보냈을 것 아닌가. 그게 궁금하고 그립고 걱정되고 보고파서 견디지 못하겠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도 써 보고 노래로도 불러 보고 말로도 퍼뜨려 보고 싶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정말 아무 것도 아닌지 확인해 보고,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면 그것은 그 무엇이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그런 발걸음 덕택에 장딴지도 좀 딴딴해지고 허벅지도 좀 여물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 발놀림 덕분에 휘청거리던 허리도 좀 꼿꼿해지고 흐리마리 늙어가던 정신머리도 좀 맑고 깨끗해졌으면 하는 소망이 어찌 없었을까. 그런 부지런함을 신발끈에 붙들어 맬 수 있다면 쉰둘 나이의 깊고 넓은 강도 좀 쉽게 건너갈 수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상상과 허랑한 바람이 도둑놈 심보처럼 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가야 할 까닭이 있는 길은 힘들지 않다. 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나그네는 외롭지 않다. 만나 나누어야 할 이야기를 짊어진 사람은 무거움을 모른다. 길가에 자라난 질경이에게라도 웃음 던질 수 있다면 그 길은 꽃길이다. 흘러가는 구름에게라도 노래 불러줄 수 있다면 그 신발은 비행기이다. 가야 할 곳을 정해 놓은 길은 멀지 아니하고, 다시 돌아올 곳이 있는 여행은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아니하다.

 

 

가니, 좋고 좋고 좋을 뿐이다. 오르니, 숨가쁘고 다리 아프고 장딴지 허벅지 당기고 다시 허리 아플 뿐이다. 아직은 찬바람인지라 코끝이 맵사하다 끝내 콧물이 흐른다. 모자 속과 등허리엔 엷은 땀이 배어 나온다. 발가락은 간질간질하고 손가락은 근질근질하다. 여섯 시 오르기 시작하여 일곱 시 집에 당도하니, 좋고 좋고 좋을 뿐이다. 우리 동네 초저녁 불빛들과 골프연습장 밝은 불빛을 이윽히 내려다보고 있는 초승달에게 눈 찡긋 인사 건네는 재미도 맛나다. 열 아니 스무 가지 장벽이 있고, 서른 아니 마흔 가지가 발목을 잡는다 해도, 백 아니 이백 가지가 방해한다 해도 가야 할 길이었다, 그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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