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뿐 아니라 결단, 교섭, 조정, 중재, 공감능력 등 종합적인 능력 보여야"

참으로 극적인 반전이다. 전쟁 위기설이 나돌던 한 달 전만 해도 남북한의 최고위급 지도자들이 손을 맞잡으면서 웃고 대화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부부장의 만남은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한 관계가 녹아내리는 신호탄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실상의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 초청’ 친서 전달로 남북관계는 물론 동북아 정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출구를 찾지 못해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던 한반도 정세가 아연 활기를 띠면서 아직은 실체가 잡히지 않지만 뭔가 모를 기대와 희망으로 설레고 있다. 스포츠와 문화행사 등 비정치적인 교류가 내장한 무한한 잠재력에 놀랄 뿐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형성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 나아가 동북아 주변환경의 변화는 남북한의 미래에 크고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저 9년 동안 한국 사회 곳곳이 망가지고 후퇴하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 빈부 양극화와 청년실업, 출산 기피, 자살률 급증 등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공평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머릿속에 열패감을 각인시켰으며, 지수로 나타난 언론 자유의 급락에서 보듯이 정치적 민주화도 심각하게 훼손됐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철퇴를 맞은 곳이 바로 남북관계 분야다. 이명박 정부에서 2010년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 이후 느닷없이 단행된 5.24 조치로 남북관계는 단절, 동면기에 들어갔다. ‘뼛속까지 친미’였던 이명박 정권이 강제로 ‘천안함 폭침’으로 명명한 천안함 침몰사건은 수많은 반대증거와 납득할 수 없는 전후관계 해명 등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소행’으로 규정돼 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적지 않은 집단과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이의와 반론, 항의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이같은 기류는 ‘최순실의 아바타’로 밝혀진 박근혜 정부에서 2016년 2월10일,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한 개성공단 폐쇄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파괴된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상생, 공존하는 방향으로 다시 세우려면 남북 모두 비상한 노력이 경주돼야 한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가들의 엇갈리는 입장과 북한에 대한 호불호가 평창 올림픽에 참가한 각 국 대표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중에서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일본 총리 아베의 언행은 구설수에 오르기 충분했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부친과 함께 오겠다고 한 펜스는 천안함기념관을 방문하고, 서울에서 탈북자들과의 간담회를 여는 등 북한압박에 집중하는 일정을 짰다. 방한하기 전부터 미국을 대표해 올림픽을 축하하러 오는 게 아니라 북한을 자극해 도발을 유도하려는 정치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펜스가 네오콘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올림픽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개최국인 우리나라에 매우 무례한 행동을 하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미국의 어느 언론은 펜스의 방한이 "북한이 올림픽 메시지를 납치(hijacking)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것 같다"고 했다.

방한 이후에는 더 가관이었다. 헤드 테이블에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동석하기로 돼 있었던 펜스는 행사 시작시간보다 10분 늦게 리셉션장에 입장해 일부 인사들과 인사한 뒤 5분 만에 행사장을 떠났다. 김 상임위원장과는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미국 선수단과의 만찬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고 사전 통보했고, 리셉션 행사장 바깥에서 포토세션에만 참석한 뒤 빠지려다 문 대통령의 권유로 행사장에 잠시 들렀다는 청와대의 설명이 궁색하기만 하다. 리셉션 참석은 평창올림픽에 참여한 각국 대표단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펜스는 도대체 왜 평창올림픽에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표라고 북한과 한국을 얕보는 오만방자한 행동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일본 총리 아베도 펜스 못지않은 결례와 내정간섭성 발언을 일삼았다. 아베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니며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북한과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는 주제넘은 참견이 아닐 수 없다. 한미 군사훈련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일이며 일본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남북대화 역시 한국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일본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베의 외교적 결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 올림픽 리셉션에 30여분이나 늦게 도착한 그는 개회식에서도 다른 하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낼 때 미국 부통령 펜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미국과 일본 대표들은 평창 올림픽을 축하하러 온 건지, 훼방하러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반해 북한의 신중한 대응은 돋보였다. 뉴욕타임스(NYT)는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미소 전략’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의 ‘무시 전략’을 압도했다고 보도했다. 김여정이 2박3일 동안 스핑크스 같은 미소로 펜스를 우회 공격했다고 하는가 하면, 전 국무부 한일 담당관은 “펜스 부통령이 북한의 손 안에서 놀았다”라고까지 평가했다. 펜스가 김여정에게 외교적으로 완패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올림픽 개막식 전날 열린 건군절 열병식 규모를 축소하고 생중계를 하지 않는 등 이미 성숙한 모습을 선보인 바 있다. 유엔이 평창올림픽 개최기간 중 휴전을 결의했고, 한미가 합동훈련을 연기한 것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국제사회에 선언한 셈이다.

북한 혐오는 미국과 일본 등 외부의 점유물만이 아니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과 조중동 등 언론, 그리고 일부 단체 등 박근혜를 퇴출시킨 춧불혁명 이전까지 이 사회의 주류행세를 해 왔던 세력들은 모처럼 조성된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재를 뿌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고 부르거나 북한 인공기와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을 불태우는 것을 시작으로 냉전반공 이데올로기에 절은 수구세력의 해코지는 그치지 않는다. 압권은 ‘김일성 가면 파동’이다. 북한 응원단이 사용한 남성 가면에 대한 어느 언론사의 오보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몰아가면서 “김일성 가면 아니냐”고 트집을 잡는 것은 졸렬하고 구상유취한 태도다. 북한에서 신성시되는 김일성을 가면으로 쓰고 있다면 그만큼 자유화됐다는 반증일 텐데도 국민을 빙자한 막무가내는 끝이 없다.

이 같은 우려와 방해공작에도 평창올림픽의 입장권 판매가 연일 목표치의 99%를 웃도는 등 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며, 강릉행 KTX가 매진되는 등 초반부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의 수준은 이미 수구세력의 케케묵은 색깔공세를 한참 뛰어넘은 지 오래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국내적으로는 어떻게든 북한의 발목을 잡아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의 길로 가는 판을 엎으려는 수구세력을 제어하고, 국외적으로는 전쟁도발설을 흘리면서 북한을 위협하는 미국을 설득하는 한편, 북한을 대화의 장에 불러들일 지도자의 역량이 요구된다. 평창올림픽으로 조성된 화해 기류를 북미 대화로 연결시켜야 한다. 북한으로부터 북핵문제 진전을 위해 핵 동결 등 발전된 태도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미국은 4월로 예정된 한미군사훈련의 연기와 북한과의 평화협정 등에 진전된 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현 시기, 문재인 대통령의 지도력은 중대한 시험대 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력이란 단순한 외교력 차원이 아니라 결단력과 교섭, 조정, 중재력에 공감능력까지 포괄하는 종합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미국과 북한, 중국과 일본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예상되는 행보와 수순까지 동시에 대비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특사 파견을 주저하지 말아야 하며, 남북 정상회담도 반드시 열어야 할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모처럼 마련된 이 기회야말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기를 종식하고 평화의 길을 열 수 있는 다시 오기 힘든 호기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