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정의롭게 살면 세상은 그래도 살 만 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1. 소년이 네 살로 접어들던 1960년, 정초에 소년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본처와, 두 아이와 함께 들어온 후처와, 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3남매와 아직 뱃속에 유복자를 남겨둔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논 열댓 마지기와 밭 두어 뙈기를 남겼다. 본처와 후처는 여섯 아이들과 함께 한 집에 모여서 억척스럽게 살았다.

2. 대대로 자식이 귀한 집안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자식을 도시로 보내는 것이 두려웠다. 외삼촌이 살고 있는 전남 순천으로 큰아들을 유학 보냈다. 진주가 가까웠지만 진주에는 일가친척이 살고 있지 않았다. 소년은 전남의 명문이라는 순천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소년의 순천중학교 입학에 집안에서는 경사가 났다고들 했다. 시골 국민학교에서 순천중학교 합격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6년 내내 우등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소년이었다. 소년의 학급에는 우체국장 아들, 교사 아들, 약국집 딸, 고령토광산 소장 아들, 경찰관의 딸, 면소재지 부잣집 아들딸 등등 내로라하는 동기생들이 많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소년의 배경은 당연히 우등상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이런 출신성분에 소년은 충분히 서러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 김석봉 전 녹색당 운영위원장

3. 순천중학교에서의 유학생활은 소년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낯선 말과 생활문화를 소년은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먼저 유학 와서 순천농업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소년의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선지 형은 걸핏하면 소년에게 폭력을 썼다. 소년은 외롭고 무서웠다. 만화방이 안식처였다. 반찬이라도 장만해서 어머니가 다녀간 날이면 형 몰래 쥐어준 용돈으로 삼류극장을 전전하기도 했다. 당연히 진주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전라남도 여천군 묘도, 순천에서 가까운 그 섬에 소년의 외가가 있었다. 중학생활 첫 여름방학 때 소년은 외가에 갔고, 처음으로 바다를 만났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소아마비로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리는 또래의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년은 중학생활 3년 내내 여름방학이면 그 섬에서 살았다. 소녀의 아픈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거였다. 황폐해지는 소년의 가슴에 순정의 물결이 일었을 거였다.

4. 소년의 형은 ‘기술이 최고’라며 고령토광산 고령토 운반트럭 조수 자리를 알아봐 준다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나와 봐야 별로 가망이 없다며 심지어는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기술을 배우라고도 했다. 상업고와 공업고 인기가 높던 시절이었다. 공무원이나 교사보다 은행원이 선망의 직업이던 때였다.

어머니는 우선 이곳 고등학교라도 가라고 했다. 하마터면 면소재지 자전거방 점원이 되었을 소년은 고향 옥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년의 삶의 좌표는 이미 많이 틀어져 있었다. 몰래 틀어박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목마와 숙녀’를 읊조리는 나날이었다. 공책엔 이름 꽤나 날리는 시인들의 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부산대학교 시험은 소년에게 버거운 벽이었다.

5. 청년은 보따리를 쌌다. 주경야독의 꿈을 안고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 당감동, 기차표 동양고무 신발공장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건너편 산기슭엔 화장장도 있었다. 일고여덟이 한 방에서 하숙을 하는데 방구석에 조그만 상을 펴고 몇 권의 책을 꽂았다. 그 무렵 거기엔 낡은 시집도 몇 권 꽂혀있었다.

청년은 일자리를 찾는답시고 매일 당감동에서 영도다리까지 걸었다. 첫 일자리는 진양화학 자회사쯤 되는 학장동의 신발공장이었다. 신발 외형에 무늬를 새겨 넣는 나염부 시다였다. 화공약품 냄새가 매우 강했다. 공장을 꽉 채운 것은 독한 냄새와 희뿌연 연기와 어두컴컴한 표정들이었다.

생애 첫 월급을 받을 무렵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비 내리는 창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타오르면서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반장에게 걷어차인 것이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고, 다시 작업장에 돌아온 청년은 나염잉크를 반장의 가슴팍에 퍼 뿌리고 쏟아지는 빗속에 공장을 뛰쳐나왔다.

6. 강원도 춘천 탱크부대 수송부 정비창고 공구실 관리를 맡은 사병은 공구실 구석에 조그만 서가를 놓고 작은 도서관을 차렸다. 수송관도 선임하사도 그런 사병을 모른 체 해주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죽고, 세상이 어수선하던 다음해 5월, 부대 뒷산에서 광주의 모습을 담은 삐라를 주웠다. 참혹한 사진이었다.

부대원 중 호남에 연고가 있는 사병들은 가족에게 편지를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부대에서 제시한 표준 편지를 그대로 베껴 적는 일이었다. 사병은 여수 외가와 순천 외삼촌에게 편지를 썼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찌르자 오랑캐!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박살내자 북괴군!’을 외쳐온 사병은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7. 청년은 무전여행을 떠났다. 군대를 막 나온 1981년 3월이었다. 청년의 발걸음은 광주를 향했다. 어두워서야 광주에 도착한 청년은 광주역 대합실에 자리를 폈다. 그러나 경찰관에 의해 이내 쫓겨나고 말았다. 광주항쟁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때였다. 어둠에 휩싸인 시내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용 철구조물이 조형물처럼 수북이 쌓여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어둡고 적막한 밤길을 걸었다. 청년의 다음 목적지는 보길도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택시가 다가와 태워주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떠난 그 택시가 다시 돌아와 그냥 태워준다고 했다. 청년은 고단한 몸을 택시에 실었다. 잠시 후 심한 경적소리에 눈을 뜬 청년은 깜짝 놀랐다. 택시가 정차한 곳은 근교의 한 파출소 앞이었다. 수상쩍었던 청년은 신고를 당했고, 모든 소지품을 털어 보여주었고, 날이 훤히 밝아올 무렵에야 파출소를 나올 수 있었다. 광주의 택시운전사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청년을 괴롭혔었다.

8. 1981년 여름, 집에서 형의 농사일을 돕던 때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귀한 책 한권을 건네받았다.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이었다. 아, 세상에 이런 시가 있었다니! 청년은 서정주나 박인환을 넘어 김수영과 신경림을 찾게 되었다. 세상이 이상하다는 정도로만 여기며 살아가던 청년과 이 시집과의 만남은 축복이었다.

교정보도직에 합격하고 고향집에서 발령을 기다리던 1982년 봄 고향후배의 주선으로 조그만 모임을 가졌다. 글을 쓰는 모임을 만들자는 자리였다. 그 모임에 홍일점 한 아가씨가 나왔는데 밝고 맑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달빛이 환한 십리 신작로를 걸어 그녀네 집 담벼락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었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와 주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9. 형이 소를 키우면 소 값이 똥값이 됐고, 형이 감자를 심으면 감자 값이 곤두박질이었다. 정부의 정책을 탓하며 형은 늘 술을 마셨고, 집안 꼴은 말이 아니게 변해갔다. 이런 상황을 시로 적으면서 청년도 변해가고 있었다. 이 세상은 결코 가난한 우리들의 세상이 아니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거였다.

1983년 3월 청년은 그 밝고 맑은 표정의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밤새 소담스럽게 눈이 내린 이른 봄날, 면소재지 농협강당에서의 조촐한 예식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그해 7월1일 청송교도소 교도관으로 첫 발령이 났고, 청년은 드디어 세상이라는 망망한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갔다.

10. 청년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눈앞은 환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맞이할 세상이 생각한 만큼 처절하고 험난할 줄 몰랐을 것이었다. 정직하게, 정의롭게 살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청년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 사족

교도소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들이 있다. 그런 전문용어를 쓰는 것이 현장감도 있고, 재미도 더하겠지만 각주를 달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도 많다. 나의 <어떤 감빵생활>에는 가급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준용어를 쓰기로 하였다. 부득이 써야할 용어는 각주로 해설을 달았다.

35년이나 흐른 지금 연도와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1983년 7월1일부터 1987년 1월까지 청송교도소에서, 1987년 2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진주교도소에서 겪은 일을 당시의 관점에서 사실 그대로 써볼까 한다.

교도관과 재소자, 그 가족들에게 아픔을 남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겠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당시 나에게 상처를 받았던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빌겠다. 일주일쯤 뒤에 공개할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무연고 사망 재소자의 상주가 되었던 ‘어느 겨울날의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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