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앉아 기차를 타고, 함께 한 곳을 바라본 날이 무척 오래 되었다.

“올해는 면허증이라도 좀 따소.”

해가 바뀔 때마다 아내가 하는 소리다. 나는 아직 면허증을 가지지 못했다. 군대 수송부 복무할 때 운전면허증을 땄었고, 제대해서 일반면허증으로 바꾸지 못했다. 마흔 즈음에 자동차운전학원에 등록하고 필기시험에 합격한 적이 있었는데 일이 바빠 포기해 버렸었다. 그 뒤로 지금껏 운전면허증 딸 생각은 없이 살았다. 어딜 가나 버스를 탔고, 간혹은 기차가 나의 자가용이었다. 그것도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 이제는 승용차 앞좌석에 앉아 가면 그 속도감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아들놈 차를 얻어 타고 읍내로 나갈라치면 족히 서너 번은 “천천히 가자.”고 잔소리도 아닌 잔소리를 한다....

▲ 김석봉 농부

명색이 환경운동을 해오면서 별로 친환경적으로 살아오지 못했다. 젓가락질이 서툴러 나무젓가락을 좋아했고, 종이컵도 곧잘 썼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슬그머니 삼겹살집을 찾아들었고, 달목욕을 끊어 매일 동네목욕탕도 다녔다. 어딜 나가도 내가 쓸 컵조차 챙기지 않았다. 이래저래 나의 생활은 반환경적인 요소 투성이었다. 환경단체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었다.

그래서 한 가지는 제대로 실천해야겠다고 작심했는데 그것이 평생 동안 자동차를 가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차라리 ‘평생 샴푸 한 방울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더라면 훨씬 살기가 편했을 것이었다. 왜 하필 운전면허증을 따지 않고 자동차를 가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는지 가끔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산촌생활에서 자동차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가. 하루 여섯 대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려 일을 보러 다닌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택시를 부르고, 관내에 3대 뿐인 개인택시들이 다 장거리 운행을 나가버리면 속절없이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요즘은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막급이 더하다. 일자리라고는 군청 기간제 근로자가 거의 전부인 산촌에서 그 일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다. 그래도 관공서 근무는 알토란같은 일자리다. 산불감시원 경쟁률은 사촌 사이에도 싸움이 나게 한다. 엊그제 군청 홈피 게시판에서 춘계산불감시원 추가모집 공고와 산림병해충방제예찰단 모집공고를 봤는데 둘 다 운전면허증 사본제출은 필수항목이었다. 운전면허증 없이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어버렸다. 이래저래 구석으로 떠밀리는 팔자다.

가뜩이나 궁핍한 살림살이에 그것도 매일 놀고먹는 겨울철에 그런 일자리라도 하나 얻어야 하건만 망할 놈의 문전면허증이 문제였다. 내가 공고문을 보고 있는 사이 아내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거 봐라, 운전 못하니까 할 일이 없지?”라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마른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그러게 운전면허증을 따라니까.” 아내는 집요하게 면허증 타령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내가 따지 않으면 자신이 따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별로 민첩하지도 않고 감각도 둔해 보이는 아내에게 운전면허증은 안 된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옆 좌석에 앉았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어련히 운전학원에 등록도 하련만 면허증을 따기는 영원히 글러먹었다. 고소공포증이 문제다. 길이란 길은 죄다 직선화하고, 굴 뚫고, 다리를 놓았다. 진주 한번 다녀올라치면 이 산에서 저 언덕까지 높이 50m도 더 될 다리가 수두룩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그 높은 다리 위를 지날 때는 어질어질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데 어찌 눈 뜨고 운전을 한단 말인가.

그런 이유를 들이대기가 민망하여 자동차 면허증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경제성을 따졌다. “자동차 살 돈은 어딨냐.” “자동차보다 택시가 더 경제적이다.” “우리 살림에 자동차세, 보험료, 기름값 다 어찌 대며 사냐.” 이 지점에 이르면 아내의 자동차와 면허증타령도 폭삭 꺾여버리고 말았다.

“봄이 오기 전에 우리도 여행이나 한번 다녀옵시다.” 도라지정과 포장을 하면서 아내가 뜨악하게 말했다. 여행이란 이야기만 나오면 못 가진 자동차로 인해 주눅이 들곤 했었다. “여행? 그래 한번 가지 뭐...” 대답하는 말끝이 흐렸다. “기차 타고 한 사나흘 돌아댕깁시다.” 아내가 기차여행을 제안했다. 순간 온몸에 맥이 끊겨 주저앉은 것처럼 편안했다.

“그래. 남원에서 무궁화호 타고 강경역에서 내리는 거야. 거기 젓갈시장이 유명하거든. 그리고 다시 조치원으로 가서, 충북선으로 갈아타고 제천으로 가서, 영동선으로 갈아타고, 태백이나 황지에도 가보고, 다시 동해안으로 나가서 바닷바람도 쐬고, 다시 영동선으로 영주에 와서 경북선으로 갈아타고 김천으로 와서 직지사도 가보고, 당신 직지사 안 가봤지? 그리고 다시 경부선으로 동대구, 포항으로 가서 동해남부선 타고 부산으로 가서 요양병원 어머니도 한번 만나 뵙고, 경전선 타고 순천으로 가서 순천만 그 맛난 짱뚱어탕도 먹어보고, 순천에서 다시 전라선 타고 남원으로 돌아오면...”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잠시 일손을 놓은 아내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 무리 때까치가 앞산 기슭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또 추위가 오려는지 세찬 바람에 호두나무 가지가 부러질 듯 흔들렸다. 아내도 나처럼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해를 더할수록 무거워지는 자신의 삶이 참 서글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창밖 헐벗은 지리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손에 쥔 도라지정과가 스르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젊었던 어느 해 가을, 중앙선 기차로 조령을 넘어올 때 만난 불타는 단풍이 아내의 눈동자에 머무는 것이 보였다.

나란히 앉아 기차를 타고, 함께 한 곳을 바라본 날이 무척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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