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위를 나는 독수리들이, 새벼리를 질주하는 버스들이 대답해 주겠나

진주시 가좌동 석류공원에서 칠암동 고려병원까지 오 리 남짓한 길에는 추억이 흩어져 있다. 추억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추억인가 생각하며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건 역사이고 삶이고 반성과 후회이다. 왜 그런가. 걸어가자니 바람이 차고 버스를 타자니 너무 순식간이어서 정나미 떨어지고, 기억과 회상으로 더듬어 본다.

뒤벼리와 쌍벽을 이루는 멋진 길인 새벼리는 많은 사고로 얼룩져 있다. 눈 내린 날 새벼리엔 어김없이 인도로 올라간 차,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아앉은 차, 앞차를 들이받은 차들을 만나게 된다. 속도제한 단속 카메라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눈이 오지 않아도 접촉사고가 잦은 걸 알 수 있다.

새벼리 인도에서 휘 둘러보면 상평동 경남일보, 무림제지에서부터 진주시청, 진양교, 연암도서관, 뒤벼리, 동방호텔, 경상대병원 들이 가깝게 멀게 다가왔다가 멀어져 간다. 남강 위를 날아다니는 검은 독수리의 활강도 보게 된다. 마음의 여유가 있고 날씨가 맑은 겨울날엔 아주 멀리 지리산 천왕봉에 내린 흰눈도 확인할 수 있다. 진주에서 천왕봉이 바라다보이는 지점 가운데 한 곳이 새벼리다.

1986~88년 우리는 가좌동에서 마신 술이 모자라 시내로 진출하곤 했다. 버스 차비를 아껴 막걸리를 마셔야 했으므로 우리는 늘상 걸어다녔다. 경상대 앞에서 진주우체국 앞 청석골까지 가려면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렸다. 가는 길에 주유소 화장실에 들러 볼일도 보고, 느닷없이 달리기도 했다. 그런 시절이다.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경상대 앞에서 스크럼 짜고 새벼리 지나 진주역 앞 지나 진주교 건너 진주시청(지금의 청소년 수련관)까지 행진했다. 진주시청에서 집회를 마친 뒤 시외버스터미널~장대동~중앙광장~시청으로 돌면서 민주화를 외치기도 했다. 당시 우리의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였다. 영화 <1987>의 한 장면이다.

지금은 한주럭키아파트, 금호석류마을, 현대아파트, 한보아파트가 들어선 주약동은,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대동공업, 대동중공업, 대동기어가 있던 곳이다. 대동공업은 1947년 김삼만이 설립한, 경운기ㆍ트랙터ㆍ콤바인ㆍ이앙기 등 농기계를 전문으로 생산·판매하는 회사이다.

어릴적 시골에서 경운기 한 대는 어마어마한 자산이었다. 소가 끄는 써레, 수레 따위로 가족단위 농사를 짓던 우리들에게 경운기는 황소 100마리보다 커 보였고 숫말 100마리보다 힘센 로봇으로 보였다. 소작농이던 우리집은 경운기를 가져보지 못하고 1979년 진주로 이사했다.

<다음 백과>에서 잠시 대동공업에 대해 찾아본다.

 

▲ <1947. 대동공업 창립 (경남 진주)> (대동공업 누리집에서 가져옴)

대동공업을 세운 김삼만은 열세 살 때부터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형제들과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농기구를 제작하며 사업을 키워 나갔다. 1958년 미국의 한국 원조 업무를 담당했던 주한미군 원조사절단(USOM)의 지원으로 33만 8000달러의 국제협력처(ICA) 차관을 받아 1959년 대단위 공장을 건립했다. 1962년 국내 최초로 경운기를 생산한 데 이어, 1968년 농용 트랙터, 1977년 이앙기 및 바인더, 1982년 콤바인을 제작하면서 농기계 국산화를 이끌었다. 1960~70년대 정부는 농촌 개발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며 농기계 보급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이를 발판으로 농기계 전문 회사로 성장했다. 1975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기업을 공개했으며, 1990년대에 미국 현지 법인을 설립하면서 해외 진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중국 시장에 진출했으며, 2010년에는 네덜란드에 현지 법인을 설립함으로써 유럽 시장에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이후 2014년에는 미얀마 중앙정부에 1억 달러 규모의 농기계 공급사업 수주를 체결하면서, 미얀마의 농업기계화 사업을 이끌게 되었다.

대동공업을 잘 아는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대동공업은 진주 경제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였다. 대동공업 월급날에는 그 회사 정문 앞에 진주시내 식당 주인, 술집과 요정 마담들이 줄을 섰다. 외상값 받으려고. 대동공업은 진주의 상징이었고 자부심이었다.” <다음 백과>에 나오는 내용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진주에 이사 왔던 1979년에는 대동공업이 진주시 주약동에 있었다. 대동공업의 은혜와는 거리가 멀던 우리는, 나중에 큰형이 ‘대동중공업’에 입사함으로써 ‘대동’의 크기와 높이를 얼추 짐작하게 되었다. 대동중공업은 두원중공업으로 바뀐 뒤 1991년 사천으로 옮아갔다. 지금 들머리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대동중공업’이 나오는데 그건 다른 회사이다.

 

▲ <1960. 진주 주약동에 대규모 공장 건설 시작> (대동공업 누리집에서 가져옴)

문제는 대동공업이었다. 진주 경제의 70~80%를 좌지우지하던 대동공업이 대구로 옮아가겠다고 발표했다. 굳이 대구로 가야 할 까닭은 잘 몰랐다. 지금 대동공업의 주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농공읍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냥 ‘현풍’으로 불렀다. “대동공업이 현풍으로 간다”는 말은 새벼리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진주시내를 흘러다녔고 남강물을 뒤섞여 떠내려갔다.

대동공업이 이사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지역 유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반대에 나섰다. 이사하려는 명분도 반대하는 명분도 어린 우리들은 잘 몰랐다. 하지만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큰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면, 그 회사를 바라보며 먹고살던 사람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결국 대동공업은 현풍으로 갔다.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그때 진주시장이 대동공업 정문 앞에서 큰대자로 드러누워 막아야 했다. 하지만 관선(官選) 시장은 그러하지 않았다. 자기는 또 발령받아 다른 데로 가버리면 그만이니까.” 어른들은 또 이야기한다. “요즘처럼 민선(民選) 시장이었더라면 대동공업은 절대 이사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관선 시장은 윗사람의 눈치만 보고 민선 시장은 유권자인 시민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시장이 사장을 이길 수 있는지, 정치와 행정이 경제를 이길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주시장이 대동공업 정문에서 큰대자로 드러누워 있다고 하여 대동공업이 대구로 이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선 시장은 윗사람 눈치만 보고, 민선 시장은 유권자인 시민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주장에는 토를 달 수밖에 없겠다.

우리나라에서 지방선거는 1952년 시작됐다가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중단됐다. 이후 민주화에 의하여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투표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올해 6월 13일 치르는 지방선거는 제7회이다. 그 사이에 6명의 시장이 거쳐간 것이다. 한 사람이 시장을 두세 번 하기도 했으니 실제로는 서너 명일 것이다. 기억나는 사람은 백승두, 정영석, 이창희(현 시장) 등이다.

시장들은 정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도 된다. 정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된 시장이 정당 우두머리들의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하다. 유권자인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때로는 시민들의 의사와 완전히 다른 정책을 펴기도 한다. ‘민선 독재’라는 말이 나돌기도 한다. 몇 해 사이에 경상남도와 진주시에서 일어난 몇 가지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보면 대강 짐작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동공업 같은 기업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갈 때 관선시장이 아니라 민선이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전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것과, 그것과 별개로 민선시장이라고 하여 반드시 민의에 기반한 정책을 펼 것인가 하는 것, 이 두 가지에 대하여 깊이 의심하는 것이다.

남강 위를 나는 독수리들이 이런 일에 대답해 주겠나, 새벼리를 질주하는 버스들이 대답해 주겠나, 이미 대구로 떠나버린 대동공업이 뭐라고 말해 주겠나. 지방선거가 넉 달도 채 남지 않다 보니, 대동공업 있던 주약동을 지날 때마다 밑도 끝도 없이 옛일이 생각난다. 대동공업이 옮아가기 전 1970년대에는 진주가 농기계 생산의 중심지, 기계 공업 도시로 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는데 지금 그걸 되뇌고 있으면 뭘 하겠나.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만 자꾸 커질 텐데. 대동공업 창업주인 고 김삼만 선대 회장의 장남인 김상수 대동공업 회장이 지난해 10월 누린나이 83세로 타계했다는 뉴스도 본 듯하다.

대동공업이 떠난 자리는 한주럭키타운을 시작으로 현대아파트, 한보은빛마을 등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었다. 주약동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 철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자전거길이 닦였다. 진주역과 함께 사라진 철길 부근은 을씨년스럽다. 그 너머로 여씨골, 진티골이 있다. 여씨골엔 몇 해 전 대학생들이 연탄 배달할 때 따라가 보았고 진티골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어딘지도 정확히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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