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 하는 아들

TV 화면 속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2, 1, 0! 순간 굉음을 울리며 로켓이 하늘로 비스듬히 솟구쳐 올랐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가는 본체가 화면에 잡힌다. 잠시 후 보조장치가 떨어져 나간다. “성공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환호하는 사람들. 화면 밖에서 어린 나는 궁금했다. 로켓이 우주를 향해 날아오를 때, 대기권을 벗어나기 직전 분리되어 떨어져나간 장치는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그 장치는 애초부터 분리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장렬히 산화하기 위해 고안된 수천, 수만의 부품들. 그들의 역할은 다만 거기까지였다.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당시 일터에는 ‘출산휴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같은 직군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고도 일을 계속한 선례가 없었다. 고용주 입장에서도 난감할 거라고 나는 자발적으로 이해했다. 한 달 만에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며 부랴부랴 젖을 떼고 몸을 추스렸다. 다행히도 친정엄마가 가까이 계셨기에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와 나의 감정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식구가 늘었으니 더 열심히 일 해야지. 그간의 공백을 회복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 재인 초보엄마

낮에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 주시면 저녁 퇴근 무렵에 우리 부부가 아이를 데려갔다. 핏덩이는 점차 살이 올랐고 나도 그 생활에 적응해 갔다. 친정엄마는 아이가 먹다 남긴 분유를 자주 이불 밑에 넣어두곤 하셨다. 평소 밥을 버리면 죄 받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분유 한 통에 돈이 얼만데. 서너 시간 뒤에 다시 먹여도 아무 탈이 없더라”며 웃으셨다. 가끔 친정엄마의 육아방식이 나와 맞지 않는 구석도 있었지만 일일이 말할 수는 없었다. 전쟁 같은 시간을 남의 손 빌리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 때도 유별나게 예민했던 아이는 등에 센서를 달고 있었다. 업고 있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누이면 귀신 같이 알고 눈을 반짝 떴다. 친정엄마는 손목이며 어깨, 허리가 아픈 날이 부쩍 많아졌다. 어느 새 나도 아이와 친정엄마 사이에서 눈치 보는 날이 많아졌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마음이 급해졌다. 엊그제 입대한 이등병의 신세가 되었다. 지금은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급이 오르고 언젠가 제대하는 날이 오겠지. 육아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어서 아이가 자라주기만을 바랐다.

아이가 네 살 되던 해, 드디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다. 아침마다 어린이집 차 앞에서 통곡의 이별의식이 반복되었다. 가방 메고 웃으며 집을 나선 아이는 어린이집 차에만 타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울어댔다. 내 몸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선생님에게 넘겼다. 울음소리를 닫아걸고 출발하는 어린이집 차를 멀어질 때까지 눈에서 놓지 못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감이 밀려왔다. 눈이 시렸다. 주변의 엄마들이 일주일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그 다음 주에도 같은 장면이 재연되었다. 육아를 책으로 배우던 시기였다. 육아책을 넘기다 가슴에 꽂힌 말이 ‘분리불안’이었다. 익숙한 환경이나 사람과 떨어졌을 때 생기는 불편한 신체적 · 심리적 상태. 유아기의 분리불안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지만 만 3세가 넘어서도 같은 증세가 계속된다면 애착형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도둑엄마는 제 발이 저려왔다. 생후 한 달부터 아이를 떼어놓고 일하러 다니면서 애착형성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울 즈음, 아이는 어린이집 차에 타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설마 적응과 포기는 아니겠지? 역시 육아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이후에도 선생님이 바뀌거나 하면 어김없이 통곡의 아침이 찾아왔다. 그때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들은 집에 혼자 있는 걸 무서워했다.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면 온 집안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학원 가기 전까지 집에 혼자 있던 아들이 방방마다 불을 켠 채로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엄마 손을 잡고 잠이 드는 아들에게 남편은 어리광이 심하다고 나무랐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은근히 즐거웠다. 세상에 나를 이토록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보다 확실한 존재증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첫 번째 일요일, 가족들이 같이 절에 가기로 했는데 아들이 싫다고 했다. 자기는 빠지겠다고.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 아이가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우리가 절에 간다는 건, 왔다갔다 거리가 두 세 시간 이상이며 중간에 밥도 사 먹으면 네 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냥 혼자 집에 있는 게 편해요!” 충격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화난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좋아. 배고픈 거 알아서 해결하고 그동안 문단속 잘하고 있어라.”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잠바를 입고 뛰어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현관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뭔가를 할 때 아들이 빠진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남편은 “동생이랑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데 차라리 잘됐네, 오늘은 조용히 갈 수 있겠다”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절에서 부처님을 만나고 나와서 식당에 들어갔다. 낙지볶음과 재첩국을 잘 하는 집이었다. 낙지볶음이 좀 맵긴 해도 재첩국을 먹으면 괜찮다고, 남편과 딸아이는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도록 맛있게 비빔밥을 해먹었다. 나는 별로 매운 줄도 몰랐다. 아들이 밥이나 먹었을까? 혼자선 챙겨먹지도 못할 텐데. 집에서 굶고 있을 아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한참 울려도 아들은 받지 않았다. 혼자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네 시간쯤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해사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싱크대에는 아들이 먹다 남긴 컵라면 국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찬밥을 말아먹었는지 밥알도 몇 개 떠있었다. “아까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지나가듯 물었다. “아, 그때 친구랑 게임하고 있었어요. 연합이라서 전화 받으면 바로 깨지거든요” 나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게임을 즐긴 아들의 표정에선 해방의 기쁨과 환희가 역력해 보였다. 이제 혼자서도 잘 지내는구나. “다 컸네, 우리 아들!” 아들의 등을 토닥여주고 싱크대를 정리하는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로켓이 먼 우주로 날아갈 때 기꺼이 떨어져나간 보조장치의 심정을 알 수 있을 듯 했다. 그 보조장치는 분리와 동시에 대기 중에서 사라진다고 했던가. 덕분에 로켓은 무사히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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