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얘기를 단디뉴스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그 아픔과 슬픔과 고뇌를...

아내와 며느리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본다. 나는 곁눈질로 그 드라마를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가 슬퍼서였다.

나는 1983년 7월1일부터 1988년 11월 중순경까지 교도관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었다. 청송교도소 교도관으로 첫 발령이 났을 때 차라리 그만둘까 하고 망설이기도 했다. ‘교정보도직’ 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시험 직전까지 나는 ‘교정보도직’이 '교도관'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었다. ‘교정보도직’은 국가공무원이었고, 말 그대로 국가홍보물이나 기록물을 교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김석봉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면접시험을 대기하고 있는데 곁에 있는 수험동료가 ‘교도소’를 한자어로 쓰고 있었다. 왜 그런 한자어를 쓰느냐는 내 물음에 그는 “우리가 근무하는 곳이 ‘교도소’이니 면접관이 한자어로 ‘교도소’를 써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멍한 상태에서 면접관에게 불려나가 ‘대한민국’을 한자어로 쓰고 ‘교정보도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1988년 11월 진주교도소에서 5년 4개월간 걸치고 있던 관복을 벗어던지고 교도소를 나왔다. 그 무렵 진주교도소엔 2명의 양심수가 있었다. 미결수로 재판을 받으러 들락거리던 경상대학교 부총학생회장 ‘오ㅇㅇ’와 남민전사건 등으로 7년 징역형을 받아 크리스마스 특사를 앞두고 있던 ‘강기정’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엄했다. 그해 10월8일 ‘지강헌 탈주사건’이 있었고, 교도소는 비상상태였다. 근무를 마치고도 한두 시간을 총검술과 봉술훈련, 포승결박훈련을 하고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퇴근했다. 나는 당시 목욕·운동 담당이었다. 사동 사이 공터에 재소자 사오십 명씩 불러내어 삼십 분 정도 운동을 시키는 일과 주에 한번 목욕탕으로 이삼십 명씩 불러내어 십여 분 정도 목욕을 시키는 일이 내가 맡은 업무였다.

양심수는 한 명씩 따로 운동을 했고, 목욕을 했는데 목욕을 할 때는 그 두 양심수를 한꺼번에 시켜주었다. 서로 이야기라도 나눌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 둘은 목욕탕에 있고, 나는 밖에서 간부에게 들키지 않으려 보초를 서는 형국이었다. ‘오ㅇㅇ’가 집행유예로 출소하기까지 나의 보초 서기는 계속되었고, 가끔 비둘기 역할도 했는데, 그게 내가 관복을 벗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오ㅇㅇ’가 출소하던 날 밤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 나는 비번이었다. 출소했는데 집에 와서 짐을 풀어보니 쪽지가 없어졌다는 거였다. 미결 양심수가 재판을 받아 출소하게 되면 본인은 대기실에 있고 교도관이 검방을 하고 짐을 챙겨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몰라서 일어난 일이었다. ‘강기정’이 전해준 쪽지라고 했다. ‘내 이야기가 적혀 있었느냐’는 물음에 ‘약간은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말단 교도관으로 걸핏하면 따지고 드는 나는 교도소 간부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만약 그 쪽지가 그들 손에 들어갔다면 중징계는 피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고민이 컸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아내에게 ‘교도관 그만둔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전했고, 아내 또한 ‘당신 맘대로 하소.’라며 시덥잖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 아침에 사표를 던졌고, 사직하는 직원과 면담하는 것이 의무인 교도소장은 면담조차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하복, 동복, 춘추복과 모자와 신발과 혁대까지 담아 교도소 외정문 근무자에게 던져주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1983년, 내가 교도관으로 첫 발령을 받은 때는 서슬 푸른 군사정권이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전과가 많은 범죄자에게 징역형을 살게 하고 예비범죄행위를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짧게는 7년, 길게는 10년을 더 감옥에 가두는 보호감호제도를 만들어 경북 청송군 산골에 보호감호소를 두었는데 내 첫 근무지가 거기였다.

1983년 7월1일부터 1987년 1월까지의 청송교도소, 1987년 2월부터 관복을 벗어던진 1988년 11월까지의 진주교도소에서의 교도관 생활은 인간 ‘김석봉’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인권의 ‘ㅇ’자도 찾아볼 수 없었던 청송교도소, 민주화의 열풍이 몰아치던 진주교도소에서 경험한 사건들이 기억의 저편에서 켜켜이 쌓인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청송교도소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도 조세형 탈주 기도 사건과 박영두 살인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 ‘슬기롭게 감빵생활’을 하는 가운데 일어난 소소한 일들과 말단 교도관들의 애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교도소의 부정부패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진주교도소에서 만난 민주화의 계절, 양심수들과의 만남은 나에겐 낭만적인 추억이 되었다. 문익환 목사님과의 만남, 최루가스와 화염병이 난무하던 거리, 내 삶의 좌표를 정리하면서 막상 사표를 쓸 때 떨리던 그 손끝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때가 되는대로 그 때 그 이야기를 단디뉴스 독자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그 시절의 아픔과 슬픔과 고뇌를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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