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전쟁을 원하는가?"

호주

‘페더러‘는 역시 강했다. 뉘라도 손쓸 엄두를 못 낼 예각에 떨어지는 ’서버‘는 서릿발같이 준엄했다. 반 박자 빠른 스트로크와 구석을 향해 빨랫줄마냥 일직선으로 내지르는 백핸드는 황제의 칭호에 걸맞은 손속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정현‘은 ’딱 거기까지‘만이었지만 혜성같이 나타난 그가 우리에게 준 인상과 감동은 결코 페더러의 그것에 못잖았다. 팔다리 길이나 섭생의 근본이 다른지라 땡볕에 단둘이 마주 서서 짧게는 2시간 길면 4시간을 넘겨서까지 라켓을 휘둘러야 하는 이 대결은 동양인이 서양을 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한계 종목이었다. 스포츠 채널에서 괴성을 지르며 앞뒤로 내달아 라켓을 휘두르는 이들 모두 늘씬하게 빠진 팔등신의 서구인일 뿐 동양인을 보긴 어렵다. 그 불모의 코트에 22살짜리 이 땅의 아들이 흐벅진 다리통으로 굳건히 선 모습은 감개무량한 장면이었다. 세계인에 중계되는 인터뷰에서 말본새는 또 얼마나 스스럼없었으며 그 태도의 넉넉함은 어디서 학습된 내력인가. 입때껏 한 번도 끝까지 지켜본 적이 없던 ’구기‘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 이 매력적인 청년을 보는 내내 뿌듯했다. 미국인 선교사와 의사들이 땀 뻘뻘 흘리며 테니스 하는 모습을 본 고종이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했던 때로 120여 년, 소년 ’정현‘이 페더러-나달의 서울 전에서 볼 보이로 뛴 이래 12년 만의 쾌거다.

 

▲ 홍창신 자유기고가

월남

월남이 난리가 났다. 동남아에서도 만년 꼴등이던 월남 축구가 아시아축구연맹(AFC)의 U-23 챔피언십 결승전에 오른 것이다. 결승에선 비록 패했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의 드라마틱함은 능히 나라 전체를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2002년 이 땅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경적을 울리며 대한민국을 외쳤던 15년 전의 그 달뜬 시간이 떠오른다. 뉴스 시간의 단신으로만은 맘에 차지 않아 유투브를 뒤졌더니 ‘박항서’가 도배가 되어있다. 라카룸에서 아이들 하나하나를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장면, 우물우물 불분명한 발음으로 구순 노모를 걱정하며 울먹이는 모습, 월남 국가가 연주되니 가슴에 손을 얹고 배례하는 모습, 박항서! 우리가 히딩크에 열광했듯이 그가 꼭 같은 환호를 받고 있었다.

박항서의 선수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이 인다. 축구선수로는 작은 키에 안짱다리에다 이마조차 훤해 조로해 보이는 그는 화려한 발재간을 부리거나 결정적 골잡이가 아니었음에도 중계하는 캐스터의 입에서 쉼 없이 호명되었다. 90분 내내 쉼 없이 질주하는 근성 있는 악바리라 공 있는 곳에 그가 있었으니 아나운서 입에서 ‘바캉스’ ‘바캉스’가 떨어질 새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 크루이프나 베켄바우어가 ‘킥 엔드 러시’에 의존한 구식 축구를 토탈 싸커로 업그레이드 시킨 이래 그 변화를 가장 잘 구현한 이로 나는 그를 꼽는다. 그래서 이영무 박항서 박지성은 한국 축구가 낳은 가장 대단한 미드필더로 보는 것이다.

‘월남’하면 무언가 미안하다. 해결키 수월찮은 빚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항서가 좀 갚아준 것 같다. 돈으로도 어떤 외교적 재간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박항서 감독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게다가 그는 요 너머 생초 사람이다 ㅎ

 

평창

갖가지 마음 아픈 소식과 더럽고 징글징글한 정치권의 헛소리가 난무했음에도 위의 두 남자가 준 기쁨으로 지난 주는 견딜 만했다. ‘스포츠’란 물건에다 밝고 건강한 생각이 얹혀 이루어진 단맛일 것이다.

그러나 평창 올림픽을 두고 야당과 수구 언론이 벌이는 ‘짓’을 보노라면 좋고 궂고를 떠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지난 연말만 놓고 보더라도 일촉즉발 준 전쟁의 상태에 들었던 남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올림픽을 빌미로 “손잡고 같이 썰매를 타자” 나선 것이 아닌가. 무지렁이의 눈엔 일종의 기적으로 보이는데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전쟁을 원하는가? 그걸 빌미로 조성되는 공포가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토록 하고 기름진 배를 더 따습게 하는 것인가. 이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조성으로 그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하키 선수의 “출전기회 박탈”이 그 법석을 떠는 사유인가. 그것이 전쟁위험보다 소중한 가치인가. 평소 진정으로 시민 개인의 인권과 복리를 위해 복무한 기억이 있는가. 그리고 그 ‘기회박탈’은 사실관계에 합당한 주장인가. 뉴스에 비치는 홍준표의 얼골은 갈수록 준엄해지고 노기에 차 있다. 봐내기 거북하다. 부귀영화도 좋지만, 이따금 거울도 좀 들여다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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