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달라진 우리의 말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켜 주기를"

새로운 해를 맞았다. 새로운 해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경험이다. 우리는 누구도 2018년을 미리 살아 보지 못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이번 해는 처음이라 명쾌하게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지만, 아직 1월이 채 다 가지 않았으므로 이즈음에서 내가 바라는 새해 소망 하나쯤을 얘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새해에는 ‘차별’과 ‘혐오’가 곳곳에 배어 있는 우리의 일상 언어들이 차이를 존중하고 나의 고통을 자각하고 타인의 아픔을 배려하는 ‘이해와 공감의 언어’로 가다듬어지고 변화해 가기를 소망한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거칠고 삐딱하고 불공평한 말들을 더 이상 당연하고 편안하게 주고받지 않게 되기를, 오래 길들여져 온 무심하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언어 습관에서 더 자주 불편함을, 더 예민하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조금씩 달라진 우리의 말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켜 주기를,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차별과 혐오와 불평등으로 물든 언어생활과 사고방식으로부터 애초에 멀어질 수 있기를, 어떤 관념이나 관습의 틀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질문하고 고민하고 더 넓게 사고하며 자유로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여자답게 상냥하고 조신하게 행동해야지.”

“여자가 너무 설치고 나서면 남자가 기가 죽어.”

“남자애가 널 좋아해서 괴롭힌 거니까 네가 이해해 줘야 해.”

“사내애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여자분 치고는 잘하시네요.”

“남편 밥은 차려 주고 나왔나요?”

“회식 자리엔 여자가 있어야지.”

“내가 너를 딸처럼 아껴서 그래.”

“예뻐서 한번 안아 본 건데 어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그냥 웃고 넘어가.”

“누구 보여주려고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었어?”

“애초에 여자가 처신을 똑바로 잘했어야지.”

“요즘은 남자가 더 힘들어. 여자 입장만 내세우는 건 역차별이야.”

▲ 이장원 칼럼니스트

새삼스런 말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지 않다. 임금 차이, 국회나 공공기관, 대기업 임원진과 정직원 고용에서 턱없이 낮은 여성비율 같은 수치들에서도 알 수 있지만, 어떤 객관적인 통계보다도 확실한 차별과 불평등의 증거는 수많은 여성들의 경험이다. 대부분의 여성이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위협을 느끼거나 위축되어 본 경험, 부당한 차별을 받거나 폭언을 들은 경험,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희롱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여자아이, 여학생, 여직원, 딸, 엄마,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고 겪고 있는 숱한 폭력과 조롱과 비하와 차별들, 그걸 가벼운 농담과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미디어와 대중문화,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국 남자들의 의식, 하루가 멀다 하고 전해지는 ‘여성혐오’ 범죄와 끔찍한 사건 뉴스들 - ‘밥을 먹으라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 어머니를 죽인 10대 남성’ / ‘여동생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죽인 20대 남성’/ ‘편의점 알바생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죽이려 한 40대 남성’ / 성매매 요구를 거부당했다고 여관에 불을 질러 다섯 명이나 죽게 한 남성‘ (놀랍게도 이는 모두 1월 19일~20일 만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임), 이런 상황에서 “벗고 있든 아니든, 우리가 뭘 하고 있든 마음대로 만져서도 안 되고, 때려서도 안 되고, 우리를 죽이면 안 돼요!”라고 외치는 여자들의 절박한 위기감...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만화경 같은 풍경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 차별은 그저 한순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2012년 호주 통계청의 ‘개인 안전 설문조사’의 결과를 예로 들어 보자.

일주일에 평균 한 명의 여성이 현재의 배우자나 이전 배우자의 손에 죽고 있다.

여성의 3분의 1이 15살 이후에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부터 신체적으로나 성적으로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

젊은이들의 4분의 1이 배우자에게 당한 폭력을 눈감아 줘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폭력의 순환이다. 이것은 상대편을 존중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폭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폭력은 반드시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내아이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고 두둔할 때 남자 어린이는 폭력 행사를 괜찮다고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자라난다. “너를 좋아하니까 짓궂게 그러는 거야”라고 여자 어린이에게 말할 때 남자들이 놀리고 불쾌한 행동을 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자를 키우게 된다. 받아들여서는 안 될 행동이나 폭력 행사를 당한 이에게 “괜찮아. 그 정도 가지고 예민하게 뭘 그러니?”라고 무마해 버린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때때로 말이나 행동으로 자라는 아이들에게 성차별적이고 무례하고 난폭한 행위를 용인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 무심코 던지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문제 원인의 하나다. 그러나 같은 이치로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해결책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는 몇 십 년이 걸릴 것이다.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성차별적인 인식, 혐오와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는 데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차이를 평범한 것으로,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공정하거나 착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이가 우리 세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겸손은 ‘차이는 정상적인 것이라는 깨달음’ 뿐이다.

“남자는 반드시 이래야 하고 여자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 따위는 없다는 걸 알려주는 어른들, 그런 세상이 필요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코 본질적이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멋진 남성, 멋진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다. ‘씩씩한’ 사내아이와 ‘조신한’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걸 교육목표로 여기는 학교현장과 가정교육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시대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을 지적하는 것이 불행을 야기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불행을 촉발하겠노라! 행복이 폭력을 모른 척 눈감는 것이라면 나는 그 행복을 거절하겠노라!”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의 저자 사라 아메드의 말을 되새겨보며, 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우리의 언어가 더 불편하고 피곤해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질문 투성이의 세상을 질문 없이 살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매 순간 뭐가 더 옳은 길인지, 더 나은 길인지 늘 질문하고 고민하느라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기꺼이 선택하는 용기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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