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머리라도 사서 고사라도 지내볼까"

며칠째 화목보일러가 고장이다. 불을 넣는 화실 천정에서 물이 줄줄 샌다. 이 화목보일러는 들여오고 3년이 지나면서부터 나를 괴롭혔었다. 상판이 부식되어 한 방울씩 샌 물이 화실 안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리점의 안내에 따라 겉 철판을 뜯어내고 상판에서 겨우겨우 그 조그만 구멍을 찾아내 용접을 했다. 다행히 새는 물을 잡았고, 보일러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다시 2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예 물이 줄줄 샜다. 다시 상판을 뜯고 보니 바늘구멍만한 구멍이 대여섯 개나 나 있었다. 용접으로도 될 일이 아니었다. 다시 대리점에 전화를 했고, 안내에 따라 보일러 수리에 들어갔다. 상판 위 녹물과 부스러기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은박지를 깔았다. 그 위에 방염실리콘을 두껍게 덧바르고 납작한 철판조각으로 눌러주었다. 물은 더 이상 새지 않았다.

다시 2년이 지난 이번 겨울, 이번엔 화실 안쪽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겉 철판을 뜯어내도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보일러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으면 물이 새는 것을 확인할 수조차 없는 지점이었다. 설사 확인한다 해도 고칠 수도 없는 지점일 거였다. 보일러를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기름보일러가 편하긴 하다.” 화목보일러가 고장 난 그날 새벽에 아내가 이불을 한껏 뒤집어쓴 채 말했다. 이불 속이어서 코맹맹이소리로 들렸다. 화목보일러를 쓸 때보다 방안 온도가 많이 낮아 있었다. “그러네. 나무 넣을 필요가 있나... 온도기 조절할 필요가 있나...” 편하긴 해도 내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났을 것이었다. “돈만 있으면 화목보일러 치워버릴 텐데...” “그래도 화목보일러라야 따시게 겨울을 나지...” 둘 다 고장 난 화목보일러 걱정이었다. 새것으로 바꿔버리면 간단하겠지만 보일러 가격이 자그마치 350만원이라고 했다.

▲ 김석봉 농부(전 녹색당 대표)

화목보일러 고장으로 요 며칠 나는 정말 편안한 밤을 보냈다. 기름보일러는 3시간에 한 번씩 돌아가게 맞춰두면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화목보일러는 손이 많이 갔다. 초저녁에 나무 넣어 방을 덥히고, 잠들기 전에 나가서 다시 나무 두어 토막을 넣어야 했다. 방이 너무 뜨거워지면 온도를 낮춰주어야 하고, 새벽에 나가 다시 나무를 두어 토막 넣어주어야 했다. 그렇잖아도 저녁잠에서 깨면 밤잠을 설치기 일쑨데 보일러 돌보는 일은 더한 고역이었다.

마침내 보일러 기술자를 불렀다. 일당이 25만원이었다. 산골살이 10년에 나도 화목보일러에 관한 한 웬만한 기술자가 되어있었지만 이번엔 도리가 없었다. 며느리 카페에 설치된 안 쓰는 화목보일러를 뜯어 와서 우리 집 고장 난 보일러와 교체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작업은 힘들었다. 비좁은 통로를 따라 200kg이 넘는 보일러를 운반하기가 쉽지 않았다. 겨울인데도 땀이 흥건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보일러 교체작업이 끝났다.

기술자는 일당 25만원을 챙겨 고철덩어리로 변해버린 우리 화목보일러를 차에 실었다. 하필이면 추운 날 고장이 나서 나를 그토록 긴장시키고 애 먹인 보일러였다. 속이 다 후련했다. 고장이 났을 때마다 나사를 풀고 조인 자국이 여기저기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나를 거의 보일러기술자로 만들어준 공적을 인정해 달라는 듯 보일러는 화실 문을 반쯤 열어놓고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바꿔놓은 보일러에 불을 지폈다. 이 보일러는 물이 샌 적이 없어서 화실이 까실까실했다. 불은 잘 탔고, 송풍모터와 펌핑모터도 별 소음 없이 잘 작동했다. 온수온도가 금방 올라갔다. 방에 들어와 방바닥을 만지자 금세 뜨끈뜨끈한 기운이 전해졌다. 역시 화목보일러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실 따져보면 화목보일러가 기름보일러에 비해 나을 것도 없었다. 기름값이 비교적 싼 요즘은 오히려 기름보일러가 더 경제적일 거였다. 화목을 사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참나무화목은 소나무화목에 비해 훨씬 더 비쌌다. 화목 구입비용은 그렇다 하더라도 토막 내야지, 보일러실로 날라야지, 하루 족히 서너 번은 나무를 넣어야지, 가끔씩 나무가 잘 타는지 다 탔는지 확인해야지, 기온에 따라 수시로 온도기 조작까지 해야 하는 것이 화목보일러였다.

요즘은 마을에 화목보일러를 켜는 집도 많이 줄었다. 집집마다 화목보일러가 있지만 대개 가동을 하지 않았다. 더러는 병들어 죽었고, 나이가 들어서 화목을 해 나를 수 없으니 전기장판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침밥 먹으면 경로당에 나가 이른 저녁밥까지 먹고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에 보일러는 사실상 필요도 없었다. 화목보일러는 보일러실에서 자리나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저 화목보일러도 그런 보일러처럼 언젠가 애물단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도 벌써 환갑을 지난 나이가 되어버렸다. 숲에 가면 간벌한 나무가 널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숲 들머리에 경운기가 줄을 섰었지만 요즘은 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나도 해가 다르게 나무를 나르는 것이 버거웠다. 하루 열 짐을 져나르던 지난 해와는 달리 올해는 예닐곱 짐을 져날라도 무릎이 욱신거렸다. 숲에 들어 화목을 해 나르면 얼마나 해 나를 수 있겠는가. 남루한 살림살이가 화목보일러를 필요로 할 뿐이겠지. 하룻밤에 서너 번씩 보일러실을 들락거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숲 속 쓰러진 나무등걸이 아까워서 부려보는 작은 욕심이겠지.

방은 밤새 절절 끓었다. 화목보일러가 고장 나고 며칠 기름보일러를 쓸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함께 자는 강아지들은 배를 하늘로 드러내놓고 벌러덩 드러누웠거나, 아예 거실을 차지하고 잠들었다. 아내도 이불을 걷어차고 잠들었고, 나도 배만 살짝 덮었다. “보일러 나무 탔는지 가봐야 안 되나...” 새벽에 아내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아직은 별 일 없을 끼라...” 기지개를 켜는데 낮에 화목보일러 옮기느라 힘을 쓴 어깨죽지가 심하게 저렸다. “방은 따시고 좋네...” 조금 걸치고 있던 이불마저 걷어차버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화목도 한 달 남짓 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아 자나깨나 걱정이었다. 날이 풀리면 뒷골 솔밭에 모아둔 화목을 날라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 듯 보였다. 희미하게 불을 켜고 화실에 두어 덩이 나무를 넣는데 발아래가 질퍽거렸다. 어어라, 이게 무슨 징조인가.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전등을 찾는데 아내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났다. “와, 와 그라요...” 아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이고, 또 물이 새는가...” 손전등을 찾아들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오는데 앞이 캄캄했다. “똑... 똑... 똑...” 보일러 아래쪽 귀퉁이에서 삼사 초에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화실 안쪽은 아무렇지 않았다. 저 정도면 이번 겨울은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심해지지 않으면 이삼 년도 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날 돼지머리라도 하나 사 와서 보일러에 고사라도 지내볼까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지는 아침이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