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내리는 날, 우리의 '코나투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려보자.

수천 번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헤어지자는 한 마디 말에 끝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지속되고 있을 때, 이 사랑은 타인의 것과 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정말일까.

사랑이란 정형화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랑의 모습은 사람의 숫자에 정비례해 각기 다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보여준 그 무서운 집착도 사랑의 한 모습이며, 영화 ‘나쁜남자’에서 주인공 조재현이 보여준 비정상적이라 할 법한 모습도 사랑의 한 형태다.

이처럼 사랑은 정형화된 모습을 갖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랑에는 동일한 특성이 있다. 사랑의 완성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 (사진출처 = Pixabay)

철학자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윤리를 제시한 바 있다. 코나투스란 각 사물이 그 형태를 지속하고자 노력하는 본질을 말한다. 인간에게 코나투스란 자신을 보존하려는 힘이다.

한데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자신을 보존할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인 이유다. 이 때문에 우리는 타인과 연대한다. 사랑도 그 연대 가운데 하나이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증진하는 것이 선(윤리)이고,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것이 악(비윤리)이라고 봤다. 우리 자신을 보존하려는 코나투스의 증진은 우리에게 기쁨과 쾌감을 주지만 그 반대는 우리를 파괴시키며 슬픔과 우울을 부르기 때문이다.

사랑의 특별함은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며 우리의 코나투스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감히 그 사랑이 특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사랑의 기쁨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서 비롯된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준다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그들은 그들의 힘, 부, 능력을 경험한다. 이러한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의 경험 속에서 그들은 매우 큰 기쁨을 느낀다.” 

사랑을 줌으로써 느끼는 기쁨야말로 코나투스를 최고조로 증진시키는 행위라 말한 셈이다.

나 역시도 많은 사랑을 했다. 받기에만 급급한 사랑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사랑이 특별하다고 여겼다. 사랑에 실패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지속하고 있는 사랑이 정말 특별한 것이기 위해서는 사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얻는 기쁨, 타인에게 마음을 주기에 느끼는 행복이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이 돼야 한다.

첫 눈이 내린 날이다. 지금 누군가 사랑하고 있다면 먼저 따뜻한 마음을 건네는 건 어떨까. 그 건넴이 우리의 사랑을 좀 더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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