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훈의 잡설] 광대의 지혜가 필요하다

외교는 힘의 경합에서 승리한 쪽이 제안하는 거부할 수 없는 역할극이다. 김병훈 전 MBC논설위원l승인2018.01.08l수정2018.01.0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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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신년사가 매섭다못해 무서웠던 한반도의 추위를 적잖이 누그러뜨리고 있다.

그 진의를 우선은 의심하는 것이, 저간에 점층적으로 전개되어온 남북 간의 초긴장 상황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연스럽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 의심을 빌미로 북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구세력들이 귀따갑게 외쳐온 대로 작금의 안보 상황이 엄중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미국과, 국내의 적대 세력들을 염두에 둔 2중 3중의 선언과 다짐들을 안전판으로 겹쳐 쌓기 바쁘다.

트럼프와의 신속한 통화, 북의 겨울 올림픽 참가가 최우선의 목표라는 입장의 천명, 한미합동군사훈련은 잠정 연기할 뿐 중단하는 게 아니라는 거듭된 확인이 있었다. 노인분들을 모셔 대화에만 급급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마침내 트럼프가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대화 환영'이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대한민국이 제출한 '대화 승인 요청서'에 미합중국 대통령이 결재의 사인을 한 격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온갖 부정적 추측을 일삼고 말길도 모르면서 주제넘은 훈수를 일삼던 저들이(야당들,수구매체들,그리고 소수의 악의에 찬 愚衆) 마지못해 잠시나마 확성기의 볼륨을 줄인 꼴이다.

마치 누명을 쓰고 종교재판에 회부된 사제인 양 간증과 서약에 급급한 정부의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지금은 대화의 개시와 진전을 위해 저 짖어대는 견공들에게 간식을 던져줘야 할 때다. 더구나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록 저들은 끝끝내 속내를 의심할지라도.

▲ 김병훈 전 MBC 논설위원

이번 대화가 남북 어느 일방에라도 당장 어떤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별 소득 없이 끝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현실이다. 그러면 저들은 "그것 봐라. 내 이럴 줄 알았다. 대화 타령에 빨갱이들이 핵무장을 완성할 시간만 벌어준 것 아니냐." "이게 바로 백악관이 우려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거다"라며 다시금 이 정권의 무능,종북 정권의 이적행위 등을 일제히 부르짖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무릅쓰더라도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극한으로 치달은 남과 북의, 북과 미국의 적대적 대치가 만에 하나라도 무력충돌로 이어진다면, 우리가 누십년(累十年)에 걸쳐 이룩해 놓은 경제적 성취가 일순에 먼지로 흩어지는 것도 걱정이지만, 수 많은 귀한 생명이 북의 공격으로, 또는 그에 대한 미국의 반격으로 희생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폭력적 정치모리배의 손아귀에서 이제사 겨우 벗어나 걸음마를 뗀 우리의 민주공화국과, 시민이 이끄는 사회의 집단지성은 오염된 동토에 묻혀 사멸하고, 새로운 파종(播種)까지 어쩌면 또다른 한 세기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전날까지도 남과 북의 대화에 '반대는 하지 않겠다', '대화는 그들의 선택이다' 등 방관적 뉘앙스의 반응을 보이거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운 충고를 발표문에 삽입하던 백악관이 무슨 이유로 하루 만에 '통 큰' 환영의 신호를 보낸 것일까.

외교는 힘의 경합에서 승리한 쪽이 제안하는 거부할 수 없는 역할극이다. 피 튀기는 격투기의 승리자가 코가 으깨지고 눈이 부어 오른 패자의 손을 들어 올리며 존중과 우호의 제스처를 요구하면 대부분의 패자들은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 그게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지구상에 필적할 상대가 없다고 스스로 믿는 - 현실 역시 그 믿음에 부합한다- 미국이 제안하는 배역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기독교 신자가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해마다 그날이 오면 그 성스런 가식의 배역을 기꺼이 담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심지어 아이들도 웬만큼 머리가 크면 저 성스런 거짓의 축제에 순진한 척, 모른 척하며 가담해 보상을 챙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아닌가. 게다가 선물도 있는데.

암묵적으로, 그러나 명료하게 미국이 우리에게 허락한 배역이 있고, 제한된 연기의 동선이 있을 것이다. 마당극의 말뚝이가 놀이판을 제공한 귀족 또는 양반에게 무례하게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흉년이나 역병으로 뾰죽해진 민심을 달래려고, 혹은 좀 더 가혹해진 소작료와, 삭감되거나 지연된 새경을 맨입으로 떠안기는 게 켕겨서 날을 잡아 돼지를 잡고 재인(才人-在寅 아님)들을 불러 술과 함께 그 모든 몹쓸 짐들을 떠안기는 마당이었으리라.

뛰어난 광대는 아랫 것들의 정서를 공감하고 상전들의 사정(事情)을 꿰뚫어 본다 하였다. 어차피 강약(强弱)이 부동(不同)하니 당장 위아래 처지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욕이라도 시원하게 대신 해 주고 볼기는 피하자니 줄타기를 아니 할 수 없다. 광대가 줄을 타는 건 그 광대 노릇을 놀이로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산타 같은 건 애초에 없다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을 때, 기껏 잘 차려입은 빨간 산타복의 모자와 수염을 실수인 척 벗겨지게 하고, 놀란(놀란 척하는) 아이들에게 의미심장한 윙크를 던지며 퇴장하는 그런 아빠는 필시 전생에 광대였을 법하다.

너무 티가 나선 안 되겠지만 이 정부가 미국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기울기를 적시하고, 그 기울기를 타고 우리에게 부여되는, 외교라는 이름의 역할극에서 우리 배역의 한계를 광대의 몸짓과 말로라도 고백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억울함이 조금 줄어들 것 같아서다.

외세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외교의 제1 목적이다. 물론 다른 생각도 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짐이 숭고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숭고함은 그의 생명을 받아 다른 생명을 이어갈 존재에 의해서만 완성된다.

한반도에 전쟁이 난대도 능히 이 땅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는 선민(選民)도 분명 있음직하다. 수십 억 원의 혈세를 쌈짓돈으로 써제낀 전직 대통령만 봐도 쉬 짐작할 수 있다. 살겠다는 본능을 욕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그런 저들이 오갈 데 없이 이 땅을 지켜야 할 수천 만 생명의 희생을 야기할 수 있는 언행을 감히 일삼는 것까지 용서할 수는 없다.


김병훈 전 MBC논설위원  k70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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