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도 좋지만 제도가 더 좋다”

연말 이웃돕기는 1월 말까지 계속된다. 구세군 자선냄비가 12월 스타트를 끊으면, 방송사들이 앞 다퉈 모금을 이어가고, 드디어 2월 초순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이를 넘겨받아 여기저기 분배한다. 그리고 그 내역을 홈피에 올리면서 연말 이웃돕기의 대장정을 마감한다. “고맙다.” “감사드린다.” 인사말을 띄우고 내년을 기약한다. 단체장이나 의원들까지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성금이나 성품을 쾌척(?)할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시절, 지금은 한겨울이다.

 

“십시일반이라고 했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이전 선생님과 달랐다.

“모두 벤또를 책상에 올려라.”

당시는 도시락을 벤또라고 불렀다.

“반장! 숙직실에서 양푼이 4개 가져와라.”

반장이 득달같이 양푼이를 구해 왔다.

“밥과 김치 모두 부어서 섞어라. 계란후라이도 넣어라”

마지막까지 남았던 계란후라이 두어 개가 마지 못 해 던져졌다.

“다 같이 먹자. 십시일반이다”

 

남의 집 김칫국물이 불그죽죽 섞인 밥에 구역질이 목구멍을 치받아 차마 먹기 싫었지만 5학년 어린이는 눈치 보며 그걸 몇 술 뜸으로써 그날의 허기를 재우고 훗날 어른이 되었다.

▲ 박흥준 상임고문

흉년이 2-3년 이어지면 조선조 관아 앞뜰에, 성문 앞에 커다란 무쇠솥이 놓였다. 관청 곳간에서 쌀과 보리, 조를 조금 내어 솥에 쏟아 붓고 우거지와 시래기 등속을 넣은 뒤, 손으로 휘저으면 가끔 쌀알이 뜨는 머얼건 죽을 끓였다. 지팡이에 의지한 노모를 힘겹게 부축하며, 발을 질질 끌며, 늘어진 아이를 늘어지게 업고, 헐벗은 옷차림으로 추위에 벌벌 떨며, 30리 길을 허위허위 걸어, 겨우 모인 백성들은 죽 한 사발로 아사를 면하거나 죽을 넘기려다 기진해 죽거나 했다.

사랑의 온도계는 공동체의 십시일반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온도가 예년 같지 않다"느니, "경기가 안 좋아서 이웃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준다"느니 하는 기사가 모든 언론에 일제히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기사 제목은 “올해도 목표 달성”, “사랑의 온기, 사라지지 않는다.” 등등이다. “없는 사람이 온정 더 많아” 기사도 빼놓을 수 없다.

2-3개월 후에는 어김없이 뒷말이 나온다. 이번에도 언론이다. “내가 낸 성금, 어디에?” “복지관련 단체 비리 만연” “온정의 손길 줄어들까 걱정” 등의 기사가 지면을 장식한다. 잠시 관심을 끈 뒤 기사는 초점을 이동한다. 더 이상 이 문제(복지)의 본질은 다뤄지지 않는다. 검찰이 수사결과를 내놓거나 ‘어금니 아빠’ 비슷한 사건이 나면 그제야 언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달려든다. 이런 현상은 해마다 계속된다.

“제도는 싫고 온정은 좋다”는 인식이 그 원인이다. 그리고 정답은 “온정도 좋지만 제도가 더 좋다”인데 이 산뜻한 정답을 언론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아울러 가끔씩 베풀기를 즐기는 양반들도 이 정답을 싫어한다. “주는 대로 먹고 고마워해야 세상이 따뜻하고 살 만 한 거지. 아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뜻 깊은 성금을 내거나 구세군자선냄비에 꼬깃꼬깃한 지폐를 소중하게 펴서 쾌척하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은 제외하고, 조금은 살 만 한 그들의 의식은 대부분 이렇다.

5학년 어린이가 남의 집 김칫국물이 대충 스며든 밥에 구역질이라는 거부감을 느낀 것은, 마지 못 해 계란후라이를 내던진 친구 앞에서 시시때때로 주눅이 들었던 것은, 헐벗은 백성이 관가의 죽솥 앞에서 숨을 거둔 것은, 개별복지의 과정에서 해마다 잡음이 이는 것은, 당당하게 돌려받지 못하고 존심을 죽이도록 강제해 온, 지금도 강제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보편복지가 정답이다. 온정은 온정대로 소중하기 짝이 없지만. 단, 죽솥처럼 흉내만 내는 보편복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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