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마음속에'

2018년 1월 1일 첫날 다솔사로 간다. 집 근처 석갑산에서 해맞이를 하고 돌아온 아내는 부지런히 떡국을 끓였다. 목욕 갔다온 아들도 옷을 갈아 입고 신발을 신었다. 다솔사 갔다가 진주 어디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기로 예정하고 나선 길이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차지 않았다. 이런 날씨마저 한 해의 복을 점지해 주는 것같이 느껴진다. 진양호 지나 사천, 하동으로 빠지는 국도 2호선엔 새해 나들이 차량이 줄을 이었다. 막히지는 않았다. 그런 길을 보면서도 ‘올해는 모든 일이 막힘 없이 술술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뜬금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새해 첫날이다.

다솔사는 경남 사천시 곤명면 봉명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소나무가 많아서 다솔사라고 한다’는 말도 한다. 실제 절 들머리엔 소나무가 빽빽하다. 하지만 ‘솔’은 소나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명산의 불교식 이름인 방장산의 형국이 마치 대장군처럼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多率)는 의미에서 다솔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 항일 승려 한용운과 최범술이 기거했다 하여 유명해졌고, 김동리는 다솔사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 〈등신불〉을 썼다고 전한다.

다솔사는 한 해에 대여섯 번은 간다. 신혼 초부터 다니기 시작했으니 20년 가까이 된다. 특별한 까닭은 없었다. 진주 신안ㆍ평거동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인 데다 그리 크지 않고 조용해서 좋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제법 인파가 몰려 차를 멀리 대어 놓고 한참 걸어가야 한다. 해마다 법당에 연등을 달고 시주를 한다. 또한 해마다 다솔사 달력을 집 벽에 걸어놓고 음력을 헤아리고 ‘손 없는 날’ 같은 걸 확인한다. 불기(佛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 서기(西紀)까지 다 적혀 있어 요긴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복을 빌기도 하는 날이지만 달력도 하나 얻고 연말정산 기부금 영수증도 받는 날이다.

새해 첫날 복을 빌고 액을 멀리하기 위한 신도들이 줄을 잇는다. 주차장엔 보통 주말보다 훨씬 많은 자동차가 줄지어 섰다. 대부분 가족들이다. 딱 보면 안다. 어떤 가족은 등산모자에 등산화까지 갖췄다. 이들은 봉명산을 오를 것이 분명하다. 딸린 암자인 봉일암이나 보안암까지 갈는지도 모른다. 어떤 가족은 정장 차림이다. 대웅전 격인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백팔배라도 할지 모른다. 고급 승용차에서부터 작은 승용차까지 종류도 갖가지다. 절집 바로 밑에는 쑥떡과 단술을 파는 할매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오늘은 그냥 지나간다.

아내는 적멸보궁과 응진전과 극락전을 순서대로 참배한다. 나는 절에 오면 절집과 하늘과 구름과 먼산과 가까운 나무와 오락가락하는 사람들만 바라볼 뿐 법당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특별한 까닭은 없다. 가까운 나무를 보면 겨울을 실감한다. 잎사귀 하나 없는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수백, 수천 조각으로 나눈다. 인드라망 같다. 더 가까이 눈을 대면 3월을 기다리는 움이 보인다. 발갛게 고개를 내미는 겨울 속의 봄을 보면 ‘시련 속의 행복’, ‘고난 속의 영광’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이런 땐 비약이 심해지는 것도 불덕(佛德)인지 모른다.

불자들은 입구에서부터 합장을 해댄다. 물을 한 바가지 마신다. 처음 온 듯한 사람들은 아담하고도 고즈넉한 풍경과 오밀조밀 배치된 절집들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얇게 내뱉기도 한다. 적별모궁 앞 파초는 겨울이라 보이지 않는다.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파초 두 그루는 다솔사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적멸보궁 옆에는 공양미와 양초, 소원띠 들이 놓여 있다. 공양미 한 봉지는 5000원이고, 양초는 작은 게 5000원, 큰 게 1만 원이다. 소원띠는 1만 원이던가. 공양미는 5000원 주고 한 봉지씩 사서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전에 바치라는 뜻이다. 양초는 법당 뒤에 마련된 공간에 들어가서 꽂아 두면 바람이 없어서 초가 다 탈 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소원띠는 법당 뒤편 사리탑 주변 울타리에 걸도록 되어 있는데 바람이 불면 수백 장 소원띠가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면서 흩날린다. 금빛이라. 이 물건들을 파는 데는 사람이 없다. 양심껏 돈 통에 넣으라는 뜻이다. 머리 위에는 감시용 폐회로 텔레비전이 내려다보고 있다. 어디든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법당 안과 바깥에는 소망들이 가득하다. ‘소원성취’라는 막연한 소망도 있고 ‘수능대박’, ‘사업성공’, ‘가족행복’, ‘가족건강’, ‘가화만사성’ 같은 글귀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와서 공양미를 사고 양초에 불을 붙이고 사리탑을 돌면서 비는 소원들은 대개 비슷하다. 몇 해 전 경상대 총장 한 분은 적멸보궁 안에 커다란 연등을 달아 놓았더랬다. 그 연등에는 ‘대학 발전’이라고 씌어 있었다. 대통령이던 박 아무개 여자도 등을 달았었다. 그녀의 소원은 어찌 되었을까. 자기 의지에 따라 달았을까 지역에 있는 수하들이 알아서 달았을까 스님들이 알아서 달아줬을까.

법당에서 내려서서 종무소로 갔다. 정말 달력도 얻고 기부금 영수증도 받아야 하니까. 종무소 마당엔 기왓장을 질서정연하게 쟁여 놓았다. 가까이 가 보니 거기에도 소원이 적혀 있다. 꼬불꼬불 아랍어도 보인다. 한자로 쓴 이름도 보인다. 이 기왓장들은 다솔사가 새 법당을 짓는 불사(佛事)를 일으킬 때 쓰일 것이다. 전국에서 찾아온 불자들의 소망이 적힌 기왓장은 새 법당 지붕과 담장에 올려져 부처님을 모시는 역할을 할 것이다. 불자들은 또한 그로써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소망이 법당이 존재하는 동안 영원하라고 기왓장에 간절한 마음을 적은 것이다.

그들의 소박하고 간절한 소원들은 이루어질까. 부처님은 수많은 중생들의 소원을, 적어도 하나씩이라도 들어줄까.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 될까.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불국정토(佛國淨土)로 실현될 수 있을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배운 적이 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의유당관북유람일기’를 배울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게 마음 먹기 달렸다’는 말이다.

절에 와서 ‘가족 건강’이라는 소망을 빌 양이면, 그 정성과 그 마음으로 평소 건강을 다질 일이다. ‘수능대박’이라고 쓸 것이면 그 정성과 그 마음으로 평소 열심히 공부할 일이다. 그 수험생의 부모라면 자녀가 제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평소 마음을 다하여 지도하고 돌볼 일이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한 소망을 적은 사업가라면 평소 사업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신의를 지키며 열과 성을 다하여 직분에 임할 일이다. 그렇게 하는 마음이 곧 소원을 비는 마음이고, 그 마음이 부처에게 가 닿아야 한다. 그 부처라 함은 결국 자기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니 마음이 곧 부처 아닌가.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제 스스로 노력하는 인간을 돕게 되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도 있다. 제 스스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절대자에게 빈다고 하여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종교는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스스로 노력하는 그 땀방울 속에 부처가 있고, 스스로 공부하는 책 속에 하나님이 있다. 스스로 술을 끊고 담배를 끊는 다짐이 부처님 마음이고, 스스로 이웃과 나누는 우정과 믿음의 마음이 하나님 뜻이다.

몇 해 전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다녀왔다. 석굴암으로 건너가는 입구에서 ‘수능 100일 기도 접수’라고 써 놓은 펼침막을 보았다. 나는 ‘적어도 석굴암에 있는 부처 정도 되면 고작 수능 100일 기도 접수 따위 알량한 돈벌이에 눈독을 들일 게 아니잖은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정도 되는 부처라면 국태민안, 보국안민, 조국통일, 민주주의 실현 같은 것을 비는 데 나서야 할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솔사 적멸보궁에 누워 계신 부처에게는 무엇을 비는 게 어울릴까.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끝절)인 다솔사에서는 무엇을 비는 게 격에 맞을까. 수능대박도 좋고 소원성취도 좋고 가족건강도 좋고 사업성공도 좋겠다.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로 누운 부처는 넌지시 미소만 짓는다. ‘너희들 마음 속에 모든 답이 들어 있는데 무엇을 그렇게 안달하느냐? 네 마음이 곧 부처 아니더냐?’ 이런 미소는 아니었을까.

집에 돌아와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달력을 걸었다. 해마다 이곳에 건다. 아침밥을 먹는 위치다. 싱크대와 냉장고 바로 곁이다. 대충 대강 밥 먹고 일어서다가 문득 달력에 적힌 경구 한 마디를 무심코 읽곤 한다. 밥 먹을 때 ‘아!’라고 감탄해 놓고 양치질할 때 까맣게 잊어버리면서도 한 달에 하나씩은 읽고 마음에 새긴다. 올 1월 경구는 이렇다. ‘진실을 진실인 줄 알고 진실 아닌 것을 아닌 줄 알면 이런 사람은 그 바른 생각 때문에 마침내 진실에 이를 수 있다.’(법구경 쌍요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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