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밥벌이조차 하지 못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지도...

홈플러스에서 옛 법원 앞으로 걸어간다. 법원 근처에서는 진양교를 건너기도 하고 뒤벼리를 지나기도 한다. 약속 장소가 법원 앞에 있기도 하고 진양교 건너 경남과기대 건너편에 있기도 하고 시내에 있기도 한 때문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옛 법원과 검찰청 건물은 언제쯤 귀신이 출몰할지 기다리는 듯 괴괴하다.

이 길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걷게 되는데, 매번 다른 길을 걸으려고 노력한다. 한 번은 시청 뒷길로만 가고, 한 번은 중간에 자유시장 쪽으로 내려서고, 한 번은 일부러 시청 1층을 통과하고 이런 식이다. 그런 재미가 있다. 골목골목 같으면서도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주로 어두워진 뒤에야 걷게 되는데 불 켜진 가겟집 간판들도 색다른 풍경이어서 즐겁다.

홈플러스는 매우 큰 건물이다. 진주에 이마트가 들어올 때 주변 상권 다 죽인다며 반대 여론이 꽤 높았다. 뒤를 이어 홈플러스가 들어왔는데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것 같다. 한 때 이마트에서 장을 봤다. 지하 주차장은 내려갈 때도 올라갈 때도 식은땀을 흘리게 한다. 홈플러스에서 장을 본 적도 있다. 아이가 홈플러스 문화센터라는 데서 역사공부하는 틈을 타 장을 본 것이다. 이런 데 가면 필요없는 소비를 하게 된다. 요즘은 잘 안 간다. 동네에 있는 농협, 축협, 펭귄마트에 자주 가고 어쩌다 새로 생긴 탑마트라는 데엘 가 본다.

홈플러스는 주변에 선 건물들 가운데 비교적 큰 건물이기 때문에 어떤 지점을 설명하기에 좋다. 길 건너편 동부농협도 그렇다. 요즘은 동부농협이라고 하면 잘 모른다. 본점인지 어느 지점인지 다시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홈플러스는 그러하지 않아도 된다.

홈플러스 건너편 동부농협 옆은 동부시장이다. 공식 명칭은 동부종합상가이다. 자그마한 밥집과 술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밥집들은 국수, 된장찌개, 어탕국수, 비빔밥, 닭국, 두루치기, 갈치조림 따위들을 주로 판다. 짜장면 집도 하나 있음직 한데 보지는 못했다. 누군가 한꺼번에 만들어 걸어준 듯한 가겟집 간판들은 개성 없이 싱겁기만 하다.

동부시장 한 쪽을 잘라내어 동부농협 하나로마트가 들어섰다. 홈플러스와 하나로마트와 동부시장은 경쟁관계인지 상생관계인지 알 수 없다. 어러저러하게 손님이 꼬여들면 밥집들이나 먹고 살 수 있을 지. 몇몇 집은 철시를 했고 몇몇 집은 배추, 상추, 대파 따위 농산물을 흥정하고 있다.

자유시장 부근은 낯선 동네다. 자동차로 지나다닌 적은 많지만 걸어다니는 길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골목마다 얼굴이 다른 데도 언제나 헷갈린다. 시청 뒷길을 걷다가 분명 자유시장 어디쯤으로 짐작하고 내려섰는데도 가다 보면 아니다.

옛 진주교육청 뒤쪽에서 진주시청 앞을 바라보며 가는 대각선 시장길은 아기자기 오밀조밀하다. 학생실내수영장에서 하대동으로 이어지는 중앙배수로와 나란한 길이다. 과일, 반찬, 과자, 족발, 신발 가게 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석가게도 있다. 없는 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고, 웬만한 건 다 있다. 특히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서는 주부라면 이 길을 한번만 걸으면 끝이다.

한 가게에 한 평이나 될까, 두 평이나 될까. 거기서 시장 사람들은 날마다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삶을 유지한다. 삶이 유지되기만 하면 얼마나 다행일까. 어쩌면 밥벌이조차 하지 못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게를 연 곳도 있고 닫은 곳도 있다. 일일이 물어보지 않았다. 가게 앞에 펼쳐놓은 어마어마한 물건들은 저녁이 되면 어떻게 할까. 집어넣을 창고는 있을까. 그냥 덮어놓고 갈까. 겨울이라 꽁꽁 얼 텐데.

가게마다 번호가 있다. 가게를 지키는 남정네든 아낙이든 제 이름이 있고 여성들은 간혹 택호라는 게 있는데, 여기서는 “몇 번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재미있다. 라디오를 들으면, “어디어디에 사는 청취자 누구누구가 보낸 사연”이라고 하지 않고 숫제 휴대전화 뒷번호를 들먹이며 “몇 번님의 사연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어묵을 두어 개 먹으며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가게이름이 없어요?” “그게 뭐, 그렇지.” “그럼 여기서는 이름을 안 부르고 45번아, 46번아, 이렇게 불러요?” “그럴 때도 있고, 애 이름으로 부를 때도 있고. 오래 하다 본께 다들 잘 아니까.” “네... 그렇군요.”

숫자 뒤로 사람의 이름도 사라지도 얼굴도 사라지고 그들의 개성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이름 두 자에도 삶이 있고 철학이 있고 가풍이 있었으련만 이제 그런 것은 그냥 한낱 기호일 뿐인가.

번호표도 개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으려도 찾을 수 없이 만들어 놓았다. 그 상인들의 자녀들이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상인들 가운데 필체가 제법 괜찮은 분이 몇 개씩 만들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본인의 것은 본인이 삐뚤빼뚤 써서 붙일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러한 것은 촌스럽게 여겨졌던 것일까.

몰개성의 시대는 이마트, 홈플러스 같은 으리으리한 건물의 가게들이 들어설 때부터 어쩌면 예고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시장 바닥에 펑퍼짐하게 퍼질러 앉아 도라지, 마늘, 미역, 우엉, 연근 따위를 파는 할머니들은 천박하다고 뭉개버리고, 깔끔하게 새겨박은 고급 상표를 군인들 모포 개켜 놓듯이 나란히 걸어놓고 세워 놓고 포개놓는 게 더 멋스럽고 고급스럽다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탓 아닌가.

자유시장은 자유로운가.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시장? 시장!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유시장에는 자본주의에 편입되고자 하는 상인과 자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상인과 자본에 매몰돼 인성을 잃지나 않을 지 걱정하는 상인들이 오늘을 팔아 내일을 사고 있다. 그들은 웃음을 팔고 인정을 팔아 자녀를 키우고 곗돈을 부으며 미래를 사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를 처분하고 혁신도시로 이사할 꿈을 부풀리며 언 손을 호호 불고 있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본다. 홈플러스, 이마트, 탑마트 들이 거대함과 세밀함을 무기로 고객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동안 이른 바 전통시장들은 전통을 제대로 팔지 못하면서 남들 흉내내기나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전통시장이라고 할 때, 그 전통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값나가는 것인가. 전통이란 굴레에 덧씌워져 옴쭉달싹 못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장이 시장답고 시장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재래시장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 아닌가. 재래라고 했을 때 어디에서 무엇이 왔다는 말인가.

자유시장을 벗어나면 진주시청 앞 육교가 보인다. 누군가 물었다. “진주에 육교가 몇 개인지 아느냐?”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한다. 도동초등학교 앞, 진주시청 앞, 경남과학기술대 앞, 케이비에스방송국 위쪽, 내동초등학교 앞, 그리고... 잘 모르겠다.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세운 육교 밑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사고가 잦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요즘은 어떨까.

육교를 지나고 시청을 구경하며 퇴근길 바쁜 차들의 불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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