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에 왔던 길을 돌아가며, 미끄러지기도 하며

며칠 전 눈폭풍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저 눈보라 속을 걸어 금계마을 식육식당에 가서 한잔 하고 오면 좋겠다.’ 커피를 앞에 놓고 아내와 나란히 앉아 창밖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말을 건넸다. 금계마을까지는 오릿길이 더되는 제법 먼 거리다. ‘아이구야... 무슨 낭만으로...’ 아내가 생뚱맞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래... 춥겠다... 좀 청승스럽겠고...’ 생각을 접으면서도 꼭 한번 가고 싶다는 마음은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었다.

산골살이 10년이 지나자 주변이 많이 정리되는 듯하다. 지난 해까지는 그래도 다사다난한 삶이어서 우리가족 10대뉴스도 만들었는데 올해는 딱히 기억할 만 한 일이 없다. 그야말로 잔잔한 세월이었다. 새로 들어온 강아지도 한 마리 없었고, 특별히 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었다. 굳이 한 해를 돌아보자면 손녀 첫돌과 내 회갑을 맞아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아내의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던 아픈 시간을 보냈고, 최근 아들 녀석의 일터에서 일어난 일로 속상한 시간을 보내는 정도의 나날이었다. 참으로 이야기꺼리도 없는 무덤덤한 세월이었다.

바깥나들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일가친척이나 지인의 경조사를 제외하면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처음 몇 년은 밖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도시에서 하던 일을 완전히 놓지 못했던 때였다. 지리산둘레길 만드는 일이나 녹색당 일도 있었고, 마을 일로도 바깥나들이가 잦았었다. 마을 일마저 손을 놓은 올해 들어 비로소 나는 촌부가 된 것이다.

▲ 김석봉 농부(전 녹색당 대표)

그래설까. 농사는 파종하는 것마다 풍작이었다.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듯, 밭에 나가 보살피는 시간이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먹덩이만한 파프리카가 열렸고, 팔뚝만한 우엉을 캤고, 오이는 한 상자씩 따서 장아찌를 담갔고, 양배추는 수박 크기로 자랐고, 수박은 한 포기에 서너 덩이씩 달렸다. 참으로 풍요로운 해였다.

아내도 나름 안정된 한 해였을 것이다. 비록 세끼 밥을 다 챙겨먹는 삼식이 남정네가 곁에 있어 귀찮기도 했겠지만 병원도 함께 가 주고, 방석 만드는 밑그림도 그려 주었으니 그런 대로 곁붙이 노릇은 한 셈이다. 내가 집에 있으니 마음 놓고 취미생활도 즐겼다. 산 너머 남원 산내에 그림그리기 모임과 바느질 모임에도 나가 작품전시회도 가졌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다들 송년모임으로 바쁜가 보다.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을 엿보면 요즘은 온통 송년모임으로 도배되다시피 한다. 어떤 지역인사는 내리 사흘 동안 이런저런 송년모임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하기야 나도 그냥저냥 도시에서 살았으면 그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가 가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송년회 초대장은 딱 한 장 받았다. 그 송년회도 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버스 몇 번 갈아타고 가서 서로 안부나 확인하고, 밥 한 그릇 먹고, 제각기 주변에서 일어난 성공과 실패의 잡다레한 이야기 나누다 불에 덴 듯 돌아와야 할 송년회 아닌가.

황혼과 마주한 인생이 서러워 버스터미널 선술집에서 한 잔 술을 마시고 홀로 막버스를 타야 한다면, 불야성을 이룬 도시를 벗어나 먹물처럼 캄캄한 버스 차창에 얼굴을 대고 늙수구레 변해가는 내 모습을 비춰볼 거라면 굳이 해야 할 나들이도 아니잖은가. 해가 갈수록 더 철저히 외로워질 삶이라면 진즉에 송년회 따위는 잊어버리는 것이 좋지 않은가.

‘당신, 그 모임이 언제라고?’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말을 붙여온다. ‘22일인가...’ 밥숟갈을 들다말고 건성으로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22일... 민박손님은 없는 날이네...’ ‘그래도 안 갈라고... 밤에 오기도 어렵고...’ 요즘은 겨울이라 마을 들머리 고갯길이 얼어붙으면 빙빙 둘러서 와야 하는데 택시비가 두 배는 더 비싸게 든다. ‘그래도 가 보지... 자꾸 그렇게 집에만 있어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하다.

다시 며칠 전 그날처럼 눈폭풍이 오면 아내와 함께 오릿길 금계식육식당까지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식당 미닫이문 앞에 당도해 아내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 든 눈송이를 털어주면서 희끗해진 귀밑머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구운 고기에 술을 한잔 마시고 눈보라 속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 가끔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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