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0여 년 동안 참 많이 마시고 떠들었다."

겨울비 잠시 흩뿌린 일요일 오후 4시30분 집을 나선다. 빵모자 쓰고 검정 가죽장갑 끼고 등산화까지 신었으니 완전무장이다. 평거동 10호 광장 옆 중국집 ‘자금성’에서 6시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평거동 쪽을 등지고 신안동을 헤맨다. 신안동과 평거동은 어디까지가 신안동이고 어디까지가 평거동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흔히 ‘신평’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우리집은 신안동에 있는데 주민센터 일은 평거동에서 본다. 자금성과 내가 헤매는 곳은 제법 멀다. 차로 가면 5분 남짓, 걸어가면 15분 남짓 걸릴 거리이지만 어쩐지 자석의 엔극과 에스극처럼 멀게 느껴진다. 마치 뜨는 해와 지는 해처럼.

옛 한국은행 진주사무소 부근에서 주공 1차 아파트 부근까지 이어지는 좁다란 골목을 흔히 진주 신안동 실비골목이라고 부른다. 실비라 하면, 아는 술꾼은 아주 잘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진주만의 독특한 술집문화이다. 간단히 말하면 맥주 한 병 6000원, 소주 한 병 1만 원을 내면 안주는 무궁무진 공짜로 나오는 식이다. 그렇다고 맥주 한 병과 소주 한 병 달랑 시켜 먹고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안주는 육해공군이 총출동한다. 온갖 산해진미가 주방장의 노련하고도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술상에 오른다. 실비골목은 일반 주택가이다. 2층, 3층짜리 주택의 1층에 세든 사람들이 가게를 열어 술집 영업을 해온 것이다. 실비골목이 한창 번성할 때 이 골목에 사는 집주인들은 술꾼들의 주정과 다툼, 노랫소리를 어지간히 들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 주정꾼 중 한 명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이 실비골목을 왜 나는 서성대고 있는가. 일요일 오후 4시30분쯤 실비집에서 술 마실 사람이 있기 어렵고 더구나 거기서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다. 사실은, 자금성을 가기 위하여 남강변으로 가서 빙 둘러서 걸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실비골목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들락날락했던 실비집들의 간판을 비로소 살펴보고 싶었을까. 혹시 일찍 문을 연 주인장과 눈이라도 마주치기를 바랐던 것일까.

진주 실비골목에 실비집이 몇 개나 되었을까. 도대체 실비집이 몇 개나 되기에 ‘실비골목’으로 불렀을까. 이전에는 실비골목엔 실비집이 줄잡아 10개 가까이 되었던 것 같다(언론 기사를 찾아보니 20개 남짓 되었다고 한다). 이름을 다 외울 순 없다. 한집 건너 실비집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남아 있는 ‘금강산’, ‘사랑방’, ‘진주성’, ‘일송정실비’에다 ‘우리실비’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술주정꾼이 술집 이름을 외워서 무엇하겠나. 지금 실비골목엔 앞서 말한 실비집 네 곳만 영업 중이다. 대신 민속주점이 두어 곳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예전 단골인데 주인이 바뀌고 또 바뀌어 발길이 끊어졌다. ‘해찬솔’은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나와 인연이 먼 곳이었던가 보다. ‘어게인’ 주점과 ‘연지골’ 주점은 정체가 모호하다.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천할 수 있을까 싶다.

실비골목에 다찌집이 서너 곳 영업하고 있다.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남해해물다찌’, ‘통영다찌’, ‘황금마차’가 다찌임을 선언하고 영업 중인데, 늦은 밤 이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실비집보다 다찌집이 더 시끌벅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금마차는 꽤 오래된 듯하다. 다찌는 실비와 달리 한 사람당 얼마씩 입장료(기본)를 내야 하는데도 손님은 더 많다. 그만큼 안주가 더 푸짐한 때문일까. ‘실비집은 진주, 다찌집은 통영, 통술집은 마산’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이젠 그러한 경계랄까 차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은 없어진 듯하다. 친구 하나가 이 골목에 다찌집을 열었다가 얼마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골목’의 효과를 노렸던 듯 한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실비골목을 지나 남강으로 가려던 발길을 붙든 건 길바닥에 뒹굴고 있는 웬 전단지 한 장이었다. 발길에 채이는 전단지엔 ‘폐업’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안다. 이런저런 옷가게들이 한 번씩 ‘부도’, ‘폐업’, ‘재고처리’ 같은 제목을 붙여 땡처리를 하곤 하는데 그것을 알리는 전단지이다. 바람에 밀려 가는 전단지에 적힌 ‘폐업’이라는 말이 이 실비골목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 느껴진 건 왜일까. 느닷없는 느낌이었고 예감이었다.

실비집이 몇 개 없어지고 그 자리를 다찌집과 민속주점이 차지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골목엔 이젠 돼지국밥집, 돼지구이집, 통닭(치킨)집, 국숫집, 피아노집 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겟집들이 서로 어울리기도 하고 서로 경쟁하기도 하면서 손님의 발길을 붙들고 술꾼들의 호주머니를 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실비’골목의 황금기는 끝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담벼락에 붙어 있는 예의 그 전단지와 비슷하지만 다른 가게의 ‘폐업’ 전단 때문이었을까. ‘점포임대’라고 알린 어느 가게의 안내문 때문이었을까. 실비골목이라는 이름을 쓰기 힘들어지면 이제 이 골목은 무슨 이름표를 달고 손님을 불러모을까 궁금해진다.

지금 진주시 신안동, 평거동 상권은 10호 광장 근처로 옮아간 듯하다. 세밀한 분석과 현장답사를 하여 얻은 생각은 물론 아니다. 세밀한 분석과 현장 답사는 아니지만, 평거동 새로 생긴 탑마트 부근과 실비골목 부근을 비교해 보면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주인 아주머니를 옆에 앉혀 놓고 맥주잔 기울이며 인생의 황금기를 되돌아보는 중년 이상의 남자 말고 이 실비골목에서 배회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실비집 주인들은 가게를 팔고 딴 데로 떠났고 새로 이 골목을 접수하러 나타난 젊은 사장들은 실비보다 다른 업종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어느집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나면 그걸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발길을 끊게 되는 일도 있다. 반면 10호 광장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20대에서 40대 후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길 만한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진주 신안동 실비골목은 한때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 이곳을 찾아 진주만의 독특한 술집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들머리 사이트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진주 실비’로 검색하면 많은 글과 사진이 쏟아진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동그란 술상 하나에 예닐곱 명이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아 한 이야기 또 하고 지나간 이야기 또 해대다가 술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정을 나누던 시절의 그림이 줄줄이 나온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보통 어느 지역에 가면 그 지역만의 음식문화를 잘 살린 골목이 있다. 모든 도시가 그런 건 아니다. 전주에 가면 막걸리 골목이 있다고 한다. 진주에 가면 실비골목이 있고 또 횟집 골목도 있다. 그 골목에 가면, 노리고 간 집에 빈 자리가 없어도 바로 옆집을 가면 되므로 걱정할 게 없다. 어느 집을 가더라도 큰 차이 없이 어슷비슷한 안주를 값싸게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맛과 멋 때문에 ‘무슨 무슨 골목’을 찾곤 한다. 진주 실비골목엔 ‘실비집’이 네 곳밖에 없다. 다찌집이 세 곳이고, ‘주점’으로만 정체를 밝힌 집이 두 곳이다. 실비골목의 명성은, 어쩌면 무슨 가게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 운명을 다하여 내건 ‘점포임대’ 안내글 한 장이 말해주는 듯하다.

200미터 남짓 되는 실비골목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온갖 잡생각을 다 한다. 근 10여 년 동안 지나다니면서 이 집 저 집 할것없이 참 많이도 마시고 떠들었다. 그런 농담도 아니고 고함도 아닌 헛소리들을 군말없이 들어주고 때로는 위로해 주던 주인들이 고맙다. 마주앉아 동서고금 우스개는 다 주워섬기던 그들, 은밀하고 진지하게 미소지으며 훗날을 도모하던 그들, 애저녁부터 술에 취하여 바짓가랑이에 맥주깨나 쏟아붓던 그들, 술보다는 안주에 더 눈독들여 술잔보다 젓가락을 더 애지중지하던 그들, 그들은 오늘도 실비골목에서 고향노래를 부르며 낙엽이 되어버린 로또복권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발길을 돌려 평거동으로 향한다. 자금성으로 갈 시간이 된 것이다. 신안동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걸어간다. 진주문고 근처를 지나간다. 사람이 많다. 젊은이도 많다. 연인들은 팔짱을 끼었다. 추운 날인데도 그들의 옷차림은 가볍다. 패스트푸드점 안에는 온기가 가득하다. 길을 건넌다. 자금성 계단을 오른다. 친구들이 벌써 와 있다. 맨 구석 방이다.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평거동 아파트 숲과 탑마트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길들이 낯설면서도 정겹다. 새로운 아지트가 생긴 듯하다.

머릿속에서는 실비골목의 일요일 오후 풍경들이 엉기고 있다. 추억과 낭만을 먹고 사는 사람들, 집밥보다 술집 안주가 더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와 옛 친구를 불러내는 사람들,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맹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뒤 호주머니 속 지갑에 천 원짜리 몇 장만 남은 사람들, 가족은 멀리 있고 혼자 진주 삶을 사는 사람들, 그냥 저녁 시간을 웃음과 울음으로 채우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갈 곳은 여기 실비골목만한 데가 있을까 싶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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