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미역국은 먹었나?”에 순간 울컥

생일 아침입니다. 첫 울음과 함께 세상의 빛을 처음 본 날이지요. 제 생일은 음력으로 새깁니다. 오늘은 음력 10월 20일입니다. 올해 생일은 절기로 대설입니다. 설(눈)도 넓게 보면 ‘우기’에 해당합니다. 양력으로 따져보면 대체로 11월 중순에서 12월 초순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세상의 빛’이 어떤 것인지 그때는 당연히 몰랐고 쉰두 살로 들어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지개 같기도 하고 동굴 같기도 합니다.

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숲골마을이 고향입니다. 시골 마을의 11~12월은 가을걷이 마무리와 겨울나기 채비로 무척 바쁜 시기입니다. 따라서 제가 태어났을 즈음 춥고 바쁘고 정신 없어서 크게 환대받지 못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른 까닭도 있습니다. 위로 형님 둘 있는 집안에 또 아들이 태어났으니 아무리 아들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라도 ‘이번엔 딸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중고등학생이던 때 아버지 어머니는 무심코 “니가 딸이었다면 딱 좋았을 낀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건강한 걸 보면 가을걷이가 거의 끝날 무렵 태어난 탓에 밥을 굶지는 않은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해 숲골마을 이 집 저 집에서는 아들 너덧 명, 딸 너덧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났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입학 동기들을 대충 헤아려 보니 그렇다는 뜻이지요. 동기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사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헤어졌습니다. 아직 연락이 닿고 가끔이라도 만나는 친구도 있지만 대개 어디서 무엇하는지 잘 모릅니다.

6학년 때 진주로 이사하며 학교도 옮기는 바람에 일찍 친구들과 헤어졌습니다. 초등학교 동기들이 네이버 밴드에 소식을 올리며 꾸준히 모임을 하고는 있지만 저는 추억의 끈이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쉽사리 섞여들지 못합니다. 딱 두 번 가 보고는 안 갑니다. 졸업장을 받은 봉래초등학교도 모임을 하는 모양인데 저에게 오던 연락이 끊겼습니다.

생일을 기억하는 건 어렵습니다. 차라리 양력이었으면 좋을 텐데 음력은 일부러 달력에 표시해 두지 않으면 까먹고 넘어가기 쉽지요. 그래도 이렇게 나이들도록 기억하게 된 건 오로지 어머니 덕분입니다. 아들 넷의 생일마다 미역국을 끓이고 밥에 콩을 넣어 주었습니다. 미역국엔 조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생선도 한 마리 밥상에 얹혀 있었지요. 그렇게 수십 년을 해 주신 덕분에 제 생일이 음력 10월 20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이산이나 사별, 왕자의 난 같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살지 않은 덕분입니다. 지금은 곁님(아내) 덕분입니다.

생일은 음력 1967년10월 20일인데 호적에 올려진 건 다른 친구들보다 꽤 늦습니다. 1967년 양띠로 태어났는데 어찌된 것인지 1969년 닭띠해 1월 20일로 올려져 있습니다. 호적에 늦게 올려진 것은 고등학교 가서 알았습니다. 어떤 친구는 1학년 때, 어떤 친구는 2학년 때 주민등록증 만들러 동사무소 가기 위해 조퇴를 하거나 지각을 했는데 어쩐지 저에게는 통지서가 오지 않았습니다. 고민고민하다가 아버지께 여쭤 보았습니다. 그때서야 아버지는 긴 한숨과 함께 ‘출생등록의 비밀’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져 많은 놀림을 받았습니다. 나이도 어린 놈이 형님들과 같이 학교 다닌다고 놀렸습니다. 생일이나 나이 이야기만 나오면 야코죽었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자마자 하도 크게 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혹시나 싶어 지켜보다가 늦어졌다고 했습니다. 다른 설도 있습니다. 가을걷이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면사무소 가는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는데 그 이장이 낮술 마시느라 까먹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예방접종 통지서가 나오는데 저만 나오지 않으니 이상하게 여겨 면사무소에 확인하러 갔겠지요. 그때 돈으로 500원인가 얼마인가를 벌금으로 내면 정상 등록이 가능했는데, 그 돈이 없어 그냥 늦게 낳은 것으로 올렸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설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2년 터울로 태어난 아들들이 줄줄이 군대를 가면 어쩌나 싶어 일부러 신고 시기를 조절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같은 시기에 초등학교 입학한 것을 보면 당시 주먹구구 행정의 덕분이라고 할 만하지요?

아버지는 출생등록을 늦게 한 데 대해서는 조금 미안해 하셨습니다. 나이가 든 뒤로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무원이 되거나 보통 회사 생활을 하게 되면 다른 친구들보다 2년 정도 더 직장에 다닐 수 있지 않느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신문사 다닐 때 선배들이 ‘정년’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그 말이 그 뜻이로구나 느꼈습니다. 스스로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다른 친구들보다는 어쨌든 한두 해는 더 밥벌이하겠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지겨운 것을 그렇게나 더 해야 하는가?’ 싶습니다만.

대학 다닐 때는 짓궂는 노래로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니?”로 가사를 바꿔 부르곤 했지요. ‘얼굴도 못생긴 게’를 ‘공부도 못하는 게’라고 바꿔 부르기도 하고, ‘한 많은 이 세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까르르 웃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놀려도 생일인 친구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절이니까요.

생일은 축하받을 날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니까요. 한 사람이 태어나는 건 온 우주가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니까요. 그가 살아온 삶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축복할 만한 날입니다. 그가 해온 말과 하는 행동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가 맺어온 좋은 인연과 함께 만들어 갈 더 좋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나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생일을 기리고 축하하고 쇠는 것이겠지요.

2015년 12월 1일은 생일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라는 책을 낼 때 일부러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생일인 12월 1일을 발행일로 했습니다. 그때 저는, 흔히 이르는 ‘우리 나이’로 마흔아홉 살이었는데 머리말에 쉰 살이라고 썼습니다. 마흔아홉을 가득 채우는 날이기도 하지만 쉰 살로 들어가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영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올해 낸 책 <요즘 우리말께서는 안녕하신가요?>의 발행일은 12월 7일입니다. 그렇게 맞출 수 있게 된 것도 운이지요. 책은 이미 세상에 나와 있지만 아주 먼 훗날에는 제 생일에 책을 두 번이나 냈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아무튼 2015년, 2017년 저는 저에게 멋진 선물을 했습니다.

▲ 시사가 있던 날 간 아버지 산소

12월 3일 집안 시사가 있던 날, 저와 큰형은 잠시 짬을 내어 아버지 산소에 갔습니다. 이번에 낸 책을 상석에 놓고 술잔을 따른 뒤 절을 두 번 했습니다. 지난 번 책처럼 우리집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낳고 길러주신 덕분에 이렇게 책이라는 것을 내게 되었으니 감사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출판기념 의식이었습니다. 많이 팔리게 해 달라거나 대박나게 해 달라거나 하는 건 빌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하는 일에 좀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그게 그것이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어머니께는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옴마, 낼 모레 내 생일인데 미역국 끓이 줄랍니꺼?” 어릴 때였으면 “오냐!” 하셨겠지만 1941년생으로 산전수전 다 겪으셨고 아들의 농담도 눈치껏 받아넘길 줄 아시는 어머니는 “내가 배 아파 니 낳니라고 고생고생했는데 내가 얻어먹어야지, 뭐라카노?”라고 하십니다. 깔깔, 하하 웃었습니다. “또 책 내었는데 한 권 사이소”라고 하니 “까막눈이 머 읽는다꼬? 됐다!”고 하십니다. 그 정도로 맞받을 줄 아시는 어머니가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늘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바쁜 삶에 쫓기다 보니 어머니 찾아 뵙는 게 예전같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받지 않으셨습니다. 은근히 걱정되었습니다. 다시 전화했습니다. “미역국은 먹었나?”라고 먼저 묻습니다. 순간 울컥했는데 용케 잘 참았습니다. ‘낳아 주셔서 고맙다’는 말은 직접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전화한 걸 아시겠지요. 날도 많이 추워졌는데,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수도는 얼지 않았는지 냉장고 속 반찬들은 상하지 않았는지 하나하나 여쭤 봐야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인자 밥 먹고 치우고 일하러 나가끼다.”는 말씀에 모든 게 안심되어서입니다. 생일이 되어야 이런 것을 생각해 내는 걸 보면 불효가 막심합니다.

▲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 보내온 선물들

어제 오전 웬 우편물이 왔습니다.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 보낸 것입니다. 열어 보니, 저에게 꼭 맞는, 저에게 가장 절실한 그 무엇입니다. “큰들에서 키우는 헛개나무, 가지와 열매를 이번 가을에 말렸습니다. 가지 250g과 열매 250g을 보내드려요~ (견본품 30g 함께 보냅니다)”라고 써 놨네요. ‘헛개나무의 효능’과 ‘헛개나무차 끓이는 법’도 적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알뜰하고 살뜰할 줄이야 이전에는 미처 몰랐지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선물을 받았으니 더 오래도록 큰들을 후원해야겠습니다. 비록 한 달에 1만 원밖에 안 보내지만요.

어제 저녁은 일상적인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떠들고 노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생일 케이크를 사 와서는 노래까지 불러줍니다. 생일도 미리 축하하고 책 출간도 축하한다는 뜻이겠지요. 고맙습니다. 집에 가니 곁님(아내)은 생일상 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놓인 건 선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챙기는 건 더러 해 보았지만 이런 일엔 늘 익숙지 않네요. 아침에 미역국에 좋아하는 잡채, 옥돔구이, 나물 들을 아주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생일이라 좋네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아내가 차려준 생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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