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言! 隣隣! 勞勞! 世世!”

70년대 초, 어느 중소도시 농산물시장에서 어린 내가 직접 봤던 일이다. 100리는 더 떨어진 산촌에서 토마토를 팔러 온,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농민이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 무렵이었다. 이 농민은 막걸리를 주전자째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토마토를 집어던지고 짓밟기 시작했다.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부서지고 으깨진 토마토가 도로를 순식간에 핏물(?)로 뒤덮었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그 난처한 상황을 피해가기에 바빴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했을까. 씨알이 잘다는 이유로 아무도 자신의 상품에 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이 농민은 가격을 낮춰 토마토를 처분함으로써 운송비라도 건지는 합리적(?) 결정을 하는 대신 자신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울분을 폭발시켰다.

현장에서 조금은 떨어진 안전지대에서 사람들 틈 사이로 이 광경을 안전(?)하게 지켜본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 당시 저 어른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당시만 해도 토마토는 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저 귀한 과일을 저 분은 어째서 저렇게 묵사발을 만들까” 잠시 들었던 의문은 이내 뇌리에서 사라졌다. 어른들은 ‘토마토’를 ‘일년감’이라고 불렀고 우리는 조금 배웠다고 ‘도마도’라고 칭하던 때였다. 어린 중학생에게 그냥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그 일은 훗날 나에게 세상의 평등과 노동의 가치를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다.

요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가 세상의 뜨거운 화두이다. 고백하건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행보로 인천공항공사를 찾았을 때 나는 그 광경을 감동적으로 지켜보았다. “임기 내에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은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TV를 같이 보던 아내가 그런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든 말든, ‘도대체 이 나이’에 감정을 숨기지 못 하는 추태를 떨고 말았다. 나는 이른 바 ‘문빠’가 아니다. 그런데도 흐르는 눈물을 오른 손 검지로 훔쳤고 나의 지난 날을 잠시 생각했다.

어느 조그마한 회사의 알량한 정규직이었던 나는, 나보다 훨씬 일을 많이 하고,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나보다 훨씬 일을 잘 하던 수많은 주변 동료들이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훨씬 적은 급여를 받는 사실에 재직기간 내내 한 없이 부끄러웠다. 게다가 그들은 정년이 보장된 나와는 달리 해고의 위험을 일상적으로 안고 살았다. 빠르면 6개월 만에 그만 둔 사람도 있고 길어야 2-3년을 채우지 못 하고 그들은 대부분 회사를 떠났다. 억울함을 호소할 노동조합도 그들에게는 없었고 심지어는 퇴직금도 없었다. 회사가 사회보험을 넣어 주지 않으니 그들에게는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 3개월짜리 실업급여도 없었다.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아두었던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문재인 대통령의 ‘인천공항공사 선언’으로 한결 옅어지고 그 선언이 죄의식으로부터도 나를 조금은 여유롭게 했음을 아울러 고백한다.

하지만 세상은 내 마음과 달라서 순탄할 줄만 알았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곳곳에서 삐걱거리고 있다. 먼저, 나를 눈물짓게 했던 인천공항공사. 최근 있었던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에서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비정규직 9천여 명 가운데 최소 3천221 명을 공사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자 공사 정규직 300여 명이 일제히 야유와 함께 고함을 질러댔다. 자신들은 그 힘든 입사시험을 거쳐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공기업의 정규직이 됐는데 입사시험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이 어떻게 ‘본사 정규직’이 될 수 있냐는 거였다.

이번에는 교원임용고시 준비생들, 지난 8월 이들의 온라인 카페 ‘전국중등예비교사들의 외침’ 회원들이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서는 안 된다며 온라인 공간을 뛰쳐나와 오프라인에서 집회를 열고 거세게 반발했다. 기간제 교사가 정규직이 되면 자신들이 가야 할 자리가 없어지거나 줄어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울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서도 청년 정규직들이 스크린도어와 철도 정비 등을 담당하는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마찬가지로 반발하고 있다,

이들의 반발논리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시험’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인데 인천공항에서는 비정규직들을 향해 “경쟁을 거부하는 무임승차자”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중등 예비교사 모임은 정규직이 되고 싶어 하는 기간제 교사들을 “교직계의 정유라”로 표현했다. 이들의 논리는 정당한가. 그러면 ‘무임승차자’ 또는 ‘교직계의 정유라’라는 표현은?

언제 어디에서든 노동은 합당한 값을 받아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그래서 운위된다. 이 글의 앞머리에 적은 토마토 농민의 사례는 노동 또는 노동의 산물이 합당한 값을 받지 못 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웅변한다. 아울러 노동할 기회는 다양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시험만이 능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제공되고 있는 노동의 질과 사회적 필요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이고 그 결과의 사회적 실천이다. 그래야 세상은 활기를 유지하며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이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해야만 정치가 바로잡혀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가 제 구실을 하려면 일단 그 구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돼야 하고 그 구실의 가치 또한 폭넓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웃은 나와 한 몸이어서 동일한 인간의 자격으로 함께 해야 할 대상이지 걷어찬 사다리 아래에 있어야 할 분들이 아니다. 같이 살아야 한다. 세상은 이미 그 쪽으로 물꼬를 텄다. 이제는 거대한 물줄기를 보는 일만 남았다.

정규직인 그대들. 그 물줄기를 거스르려는가. 도도한 흐름에 반란을 꿈꾸는가. 그 별 거 아닌 시험에 붙었다고 세상이 돈짝만 해 보이는가. 그동안의 노력이 폄훼되는 상황인가. 그대들을 제외한 ‘개돼지들’은 그럼 노력을 안 했단 말인가. 그대의 성취는 그대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그대를 성취케 하려고 하다못해 그대의 부모, 그대의 형제, 그대의 이웃이 오랜 세월 그대만 모르는 희생을 감내해 왔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기만 한 논어 안연 편의 그 말을 이렇게 바꿔보았다.

“言言! 隣隣! 勞勞! 世世!”

정규직인 그대들,

아둔한 머리를 도끼로 내리쳐

뒤늦게 깨친 뒤

나름으로 해석해 보기 바란다.

그대들이 시험에 붙으려고

아무 생각 없이 달달 외우기만 했던

그 능력이라면

최소한의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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