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은 평등,공정,정의를 해친다."

명절이나 각종 기념일(생일, 결혼, 회갑 등)에 우리는 선물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아내와 남편 사이에, 오빠.누나와 동생 사이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가벼운 선물이 오간다. 목도리를 선물하면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찹쌀떡을 곱게 포장해 선물하면 내가 합격할 것 같다. 천 원짜리 종이지갑을 선물하면 내가 부자가 될 것 같다. 선물을 주고받으면 서로의 마음이 포근하고 든든해진다. 선물은 대부분 기쁘게 주고받는다.

명절이나 각종 기념일, 인사철에 우리는 뇌물도 바친다. 뇌물은 스승, 상사, 고위공무원, 대기업 직원 등이 받는다. 제자, 부하직원, 민원인, 하청업체 사장 등이 뇌물을 바친다. 거액의 현금이나 상품권, 골프채, 굴비세트 등을 몰래 드리면 당분간은 안심이 된다. 먹은 놈이 구리기 마련이니 적어도 뇌물액수 이상으로 돌아오는 게 있겠지. 적어도 내가 부당하게 배제되지는 않겠지. 그래도 하회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인다. 뇌물은 대부분 욕하면서 몰래 주고받는다.

▲ 박흥준 상임고문

“몰래 받는 것도 한도가 있지 일상적으로 뇌물을 주고받는 방법은 없을까. 그게 훨씬 편하고 시원하잖아. 배달사고 걱정 안 해도 되고. 김영란법이 문제야. 그놈의 한도액 때문에 감질나서 살 수가 있나.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밥 먹는 데 겨우 3만원이 뭐야. 엉터리 한정식도 요즘은 3만원이 넘는데. 축의금 10만원은 또 뭐야. 이왕 합법적으로 받는 거 좀 더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것도 모자라기는 하지만. 선물도 그래. 도대체 5만 원짜리는 성이 안 차서 말이지. 일단 상한액을 올려보면 어떨까. 그러면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사회적 반발은 어떡하지? 농어민 좋도록 하는 거라고 여론전을 펴면 돼. 농어민들도 좋아할 거야.”

김영란법은 부정청탁금지법이다. 오랜 논란과 일부의 우려 끝에 작년 9월 시행됐는데 당초의 논란이나 우려와는 달리 부작용이 거의 없는 편이어서 이에 대한 여론도 좋은 편이다. 잠시의 조정기가 있었을 뿐 농어민 피해도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 법에 저촉된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는 김영란법 덕분에 우리 사회가 그만큼 깨끗해진 것으로 봐야지, 운 좋게 아직은 걸리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여서 그런 건 아니다. 드디어 우리 사회가 청렴단계로 한 발짝 들어섰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사회정화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정부가 김영란법을 손질하고 있다. 이제 겨우 시행 1년을 넘긴 법의 시행령을 고쳐서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3만원을 5만원으로, 5만원을 10만원으로 바꾸는 게 골자이다. 명분은 짐작한 대로 농어민 피해 최소화. 이번 설에는 농어민들이 이를 체감토록 하겠다고 얼마 전 국무총리가 대놓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즉각 반대성명을 낸 것과는 달리 이른 바 보수언론과 농산물 관련 단체 등은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김영란법 때문에 5만원이 넘는 굴비세트와 갈비세트 등의 매출이 급감해 농어민 손해가 그동안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게 이를 환영하는 측과 정부의 논리이다.

이들의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농어민들은 그동안 부패에 기대어 소득을 올렸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그리고 이게 떳떳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농어민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나서서 이를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부패 덕분에 소득을 올렸다는 건 사실도 아니거니와 이런 말이 나도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상한액을 높이는 건 선물이 뇌물로 가는 지름길이다. 뇌물은 부패의 근원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받는 건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무조건 뇌물이기 때문이다. 교수가 학생에게 받는 건 학점 또는 학위뇌물이고 상사가 부하에게 받는 건 승진뇌물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게 받는 건 하청뇌물이고 공무원이 업자나 민원인에게 받는 건 청탁뇌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뇌물은 기회의 순서를 바꾸어 평등을 훼손하고 과정의 공정성을 파괴한다. 이렇게 되면 결과의 정의로움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단순히 상한액 조금 높이는 게 문제가 될까? 된다. 부패의 물꼬를 트는 의미가 있기에 그렇다. 여기서 이를 막지 못하면 우리는 김영란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날을 얼마 지나지 않아 맞게 될 것이다. 김영란법뿐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감동적인 취임사, ‘평등 공정 정의’도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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