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세력은 절대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탄핵으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대형 스캔들에 휘말렸다. 국정원의 여직원이 골방에서 댓글조작을 하던 현장이 발각된 것이다.

때만 되면 국내정치에 개입해 오던 국정원이 여론조작을 노린 사건으로, 부정선거 시비가 불거지면서 집권의 정당성 자체에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박근혜가 당선된 뒤, 말만 나오면 “그럼 선거가 무효라는 거냐?”라면서 눈에 쌍심지를 켜는 당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해 야당은 대응다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원리원칙대로 수사를 밀고 나갔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의혹’으로 낙마하면서 진실규명은 물 건너갔다. 이 의혹은 댓글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아직도 사실여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채동욱의 낙마에는 정언(政言) 합동작전이 주효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정권의 존립이 위태롭다고 판단되면 으레 그래왔듯이, 조선일보가 나섰다. 조선일보는 2013년 9월 6일, ‘채동욱 총장, 혼외아들 숨겼다’라는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터뜨리면서 공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 최용익 전 MBC 논설위원

근거가 부족한 단정적인 표현과 ‘밝혀졌다’, ‘알려졌다’ 등 익명의 남용으로 뭔가 모를 음모성 냄새를 풍긴 첫 보도는 이중잣대 논란에 휩싸였다. 조선일보는 자기 회사 사장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던 텔런트 장자연이 자살했을 때는 다른 언론사의 단순한 의혹 보도에도 소송 불사로 강력 대응하겠다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또 이만의 전 환경부장관의 친자확인소송이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리자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의 예를 들면서 “(혼외자가 있다는 것이) 어쨌단 말이냐”며 이만의를 감싸고 돌았다. 그러던 조선일보가 채동욱에 대해서는 돌연, 직무와 무관한 혼외자 문제를 꺼내들고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채동욱이 검찰총장에서 사퇴하자 댓글조작 사건에 대한 수사는 흐지부지됐고, 윤석열 수사팀장을 비롯한 강골검사들은 좌천되거나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국정원에 의한 댓글조작은 사실로 밝혀질 경우, 국가기관에 의한 선거부정이자 민주주의의 전복을 노린 반국가범죄로서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메가톤급 사건이었다. 국정원의 망국적인 여론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채동욱 검찰에 대한 정권(국정원)과 조선일보의 필사적인 ‘채동욱 죽이기’ 공조가 자칫 부정선거라는 ‘악마의 늪’에 빠질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박근혜를 구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권력의 최고 책임자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보수정권의 명운이 걸렸을 뿐 아니라 발각될 경우의 위험부담을 감안했을 때, 아직 후보에 불과한 박근혜 측이 단독으로 감행했을 가능성은 만무하다. 대통령 이명박 측의 직간접적 지원이 없었다면 애초에 실행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진실은 적폐청산을 위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면 알 수 있을 터이다.

현재 이명박을 향한 검찰수사의 칼끝이 겨누고 있는 곳은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 이외에 공영방송 장악시도 사건이 또 있다.

이명박이 ‘공영방송의 무력화’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아마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때였을 것이다. 본인의 입으로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서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반성했다”고 고백하던 그 때 말이다.

2008년 4월 29일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필두로 미국산 소의 위험성을 다룬 일련의 MBC ‘PD수첩’ 보도가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한 계기였다. 집권한 지 2개월만에 국민이나 그 대의기관인 국회 누구와도 상의하는 절차 하나 없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위생조건의 빗장을 풀어버린 이명박 정권의 저의는 따로 있었다. 시한에 맞춰 협상을 마무리지으려 하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고, 내용이 부실한 졸속협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대만, 호주 등 어느 나라도 채택하지 않고 있는, 문턱을 대폭 낮춘 수입위생조건의 수용은 검역주권의 포기이며 국민 건강권을 도외시한 처사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PD수첩’을 통해 이를 알게 된 시민들은 분노했다.

매일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처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모인 촛불 시위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교육 문제, 대운하와 공기업 민영화 반대, 나아가 정권퇴진 등 점차 정치적인 쟁점으로 확대되었다. 5월 2일 첫 집회 이후 2개월여, 연일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했으나 이명박 정부는 대화와 타협 대신 광화문에 ‘명박산성’을 쌓고 귀를 닫아 버리는 길을 선택했고 결국 경찰의 강압적, 폭력적 단속이 강화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PD수첩’에 혼이 난 이명박은 곧바로 대대적인 공영방송 장악 작전 -군사작전에 가까운 치밀함과 신속성을 갖춘- 을 펼쳤다. KBS의 정연주 사장을 강제로 쫓아낸 뒤 이병순과 김인규, MBC에는 김재철 등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임명해 정권의 뜻을 알아서 모시는 하수인들로 경영진이 물갈이됐고 이 낙하산 사장들은 본부장과 국장급 전면교체로 저항적 방송인들을 현업에서 배제했다. 대표적으로 ‘PD수첩’ 제작진을 체포하는 한편, 광우병 편 보도를 놓고 집요하게 탄압을 계속했다. KBS와 MBC, YTN을 합하면 이명박 정부에서 해고 등 중징계와 좌천, 인사이동으로 방송현장에서 도태된 현업 방송인들은 수백 명 ~ 천 명에 이르렀다. 그로 인한 빈 자리는 부역형 인물들과 시용 기자, PD들로 대체되면서 정착된 것처럼 보였던 한국의 공영방송 체제는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이 작전의 하이라이트이자 피날레는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와 세계 유일무이의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이 장식했다. 2009년 7월, 국회에서의 수적 우위를 앞세운 한나라당은 신문과 방송의 교차소유를 허용하는 미디어법을 야당의 결사반대를 물리치고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조중동에게 종편채널을 나눠주는 것이 목표였다. 황금채널 부여와 광고 직접영업, 중간광고 허용 등 갖가지 특혜를 제공하면서 종편을 출범시킴으로써 방송장악은 완료됐다.

이명박은 콧노래가 나왔을 것이다. “이제는 신경쓰지 않아도 종편에서 알아서 정리해 주리라.” 공영방송 장악 덕분에 2012년, 18대 대선 때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라는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직적인 부정선거 시도에도 국내 언론은 조용했다. 해외 언론만이 한국의 부정선거를 주요 뉴스로 보도했을 뿐이다.

‘공영방송’들은 대선 부정선거의 실체와 박근혜 퇴진요구 시위에 대한 기사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그 대신 노무현이 NLL을 김정일에게 넘기려했다는 새누리당의 거짓 선동을 사실인 양 집중 보도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데 앞장섰다. 어용뉴스의 부활과 ‘PD수첩’ 같은 비판적 시사프로그램의 절멸, 이것이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의 결과다.

지난 11월 13일, 마침내 MBC 사장 김장겸이 해임됐다. MBC를 장악해온 이명박-김재철 체제가 8년, 정확히는 2814일 만에 무너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태인 포로’들처럼 지내온 MBC 방송인들의 지난한 투쟁이 큰 몫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공영방송 장악론’이 터져 나온다. 바로 자유(한국)당과 조중동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임 정권에 대해 보복하고, 방송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려 한다.” 등등. 이 말과 더불어 ‘적폐청산을 앞세운 정치보복론’이 세트로 등장한다.

이명박은 11월 12일, 해외로 나가는 길에 작심하고 검찰의 국정원 댓글공작 수사 등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활동을 비판했다.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은 대놓고 “적폐라는 덫을 치우려다 자신이 적폐의 덫에 걸리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연출해선 안 된다”고 문재인 정부를 협박하고 나섰다.(11월 21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기득권세력은 절대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적폐청산 대상에게 허점을 보이거나 대충 모양만 갖추는 식으로 했다가는 부메랑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어설프게 건드리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노무현이 임기 후 이명박의 덫에 걸려 자살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도 문재인 정부에게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폐청산을 내걸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은 이 점을 명심해야 자신도 살고 나라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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