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사료값보다 쌀값이 싸서야 되겠는가."
과거 정월대보름 동제를 비롯한 마을잔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깃발이 있었다. 깃발은 앞장서서 풍물패를 이끌었고 그 풍물패를 아이들이 졸졸 따르며 괜히 어깨를 들썩였다. 낮막걸리에 불콰해 진 얼굴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노는 광경을 보며 흐뭇해했다. 한 해 농사의 고단함을 그렇게 씻었고 다음 해의 농사에 그렇게 대비했다. 그 당시 풍물패 앞에서 대열을 선도했던 깃발은? 그러나 요즘은 보기 힘든 깃발은? 다들 기억하다시피 “農者天下之大本!!!” 이었다.
모두들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 쌀밥은 명절 혹은 잔치 때에나 만날 수 있었던 귀한 존재였다. 옥수수밥에, 삶은 감자와 고구마에, 서속밥과 수수팥떡에... 세월이 몇 번 바뀌면서 요즘은 영양식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당시에는 목넘김이 껄끄러운 조악한 음식들로 어머니들은 상을 차리고 된장을 끓여 우리로 하여금 목숨을 잇게 했다. 쌀밥은 희귀했다.
쌀밥은 오랜 세월 이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면서 걸출한 학자인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정전제를 검토했다. 정전제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한 뒤 우물 정 자 형태로 토지를 9등분해 백성들에게 8필지를 배분하고 나머지 한 필지는 공동으로 경작해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내는 구상이다. 지금 봐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더욱 혁명적인 조치여서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시행되지 못하고 과전법(벼슬에 따라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는 제도)으로 후퇴했지만 어쨌든 그 덕에 백성들은 고려 말 권문세족이나 먹던 쌀밥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이씨왕조 덕분에 먹게 됐다 해서 붙은 이름이 이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릇 어떤 정권이든 혁명 초기의 기상은 그 때뿐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렴주구가 시작됐고, 도결에 백지징세에 번작에 장리에 민중은 생산한 쌀을 정권과 그 수하들에게 거의 모두 빼앗기고 다시 초근목피 시절로 돌아갔다.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 등등은 민중의 염원이었고 그 염원은 오랜 세월 염원에만 그쳤다.
쌀을 중심으로 하는 착취와 고난의 역사는 천8백년 대 진주 농민항쟁과 해방정국의 대구 인민항쟁, 개발독재 시절의 저곡가와 양특적자 타령 등으로 이어졌고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농민들은 지금도 여전히 빼앗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가격이 문제이다. 쌀은 흔해졌지만 가격은 무려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어 벼농사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심지어 개 사료값보다 쌀값이 저렴하다.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있는데 농민에게는 최저가격이 없다. 그 주범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미FTA의 본질은 이것저것 어려운 도표나 학설 등은 빼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농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무역흑자 타령이다. 설령 무역흑자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거대자본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중소기업 등등에게는 한겨울 볕뉘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트럼프가 재협상 협박을 하면서 농민들이 또 한 번 빼앗길 위기를 맞았는데 농산물 말고는 추가로 개방할 품목이 현재로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미FTA가 출범할 당시에도 농민들은 많이 빼앗겼는데 이번에 그나마 남아 있는 것마저 더 빼앗길 판이다. 농민들의 분노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정당하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쌀밥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거의 공짜로 먹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농민들에게 오랜 세월 빚을 져 왔다고 봐야 한다. 농민들의 희생으로 산업사회를 일구었고 농민들의 희생으로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번에 또 한 번 농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한미FTA 재협상 전략을 짜고 있다고 모두들 의심한다. 農者天下之大本! 맞는 말이다. 농업이 없었으면 근대화도 불가능했다. 지난 시절 저곡가 정책으로 도시노동자의 저임금이 가능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저임금이 수십 년 계속됐기에 자본은 안정적으로 살을 찌울 수 있었다. 農者天下之大本!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밥은 없다.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갚지 않으면 날강도 신세로 전락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불행해진다. 농촌의 황폐화는 식량주권의 상실로 이어지게 되며 그 뒤에는 외국계 곡물회사들이 우리의 목숨을 먹는 걸로 좌지우지 할 것이다. 우리가 더 살기 위해서라도 이제 공짜밥은 더 이상 먹지 말자. 쌀값부터 당장 사회적으로 보전하자. 개 사료값보다 쌀값이 싸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보니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