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사료값보다 쌀값이 싸서야 되겠는가."

과거 정월대보름 동제를 비롯한 마을잔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깃발이 있었다. 깃발은 앞장서서 풍물패를 이끌었고 그 풍물패를 아이들이 졸졸 따르며 괜히 어깨를 들썩였다. 낮막걸리에 불콰해 진 얼굴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노는 광경을 보며 흐뭇해했다. 한 해 농사의 고단함을 그렇게 씻었고 다음 해의 농사에 그렇게 대비했다. 그 당시 풍물패 앞에서 대열을 선도했던 깃발은? 그러나 요즘은 보기 힘든 깃발은? 다들 기억하다시피 “農者天下之大本!!!” 이었다.

모두들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 쌀밥은 명절 혹은 잔치 때에나 만날 수 있었던 귀한 존재였다. 옥수수밥에, 삶은 감자와 고구마에, 서속밥과 수수팥떡에... 세월이 몇 번 바뀌면서 요즘은 영양식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당시에는 목넘김이 껄끄러운 조악한 음식들로 어머니들은 상을 차리고 된장을 끓여 우리로 하여금 목숨을 잇게 했다. 쌀밥은 희귀했다.

▲ 박흥준 상임고문

쌀밥은 오랜 세월 이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면서 걸출한 학자인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정전제를 검토했다. 정전제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한 뒤 우물 정 자 형태로 토지를 9등분해 백성들에게 8필지를 배분하고 나머지 한 필지는 공동으로 경작해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내는 구상이다. 지금 봐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더욱 혁명적인 조치여서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시행되지 못하고 과전법(벼슬에 따라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는 제도)으로 후퇴했지만 어쨌든 그 덕에 백성들은 고려 말 권문세족이나 먹던 쌀밥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이씨왕조 덕분에 먹게 됐다 해서 붙은 이름이 이밥이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릇 어떤 정권이든 혁명 초기의 기상은 그 때뿐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렴주구가 시작됐고, 도결에 백지징세에 번작에 장리에 민중은 생산한 쌀을 정권과 그 수하들에게 거의 모두 빼앗기고 다시 초근목피 시절로 돌아갔다.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 등등은 민중의 염원이었고 그 염원은 오랜 세월 염원에만 그쳤다.

쌀을 중심으로 하는 착취와 고난의 역사는 천8백년 대 진주 농민항쟁과 해방정국의 대구 인민항쟁, 개발독재 시절의 저곡가와 양특적자 타령 등으로 이어졌고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농민들은 지금도 여전히 빼앗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가격이 문제이다. 쌀은 흔해졌지만 가격은 무려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어 벼농사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심지어 개 사료값보다 쌀값이 저렴하다.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있는데 농민에게는 최저가격이 없다. 그 주범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미FTA의 본질은 이것저것 어려운 도표나 학설 등은 빼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농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무역흑자 타령이다. 설령 무역흑자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거대자본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중소기업 등등에게는 한겨울 볕뉘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트럼프가 재협상 협박을 하면서 농민들이 또 한 번 빼앗길 위기를 맞았는데 농산물 말고는 추가로 개방할 품목이 현재로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미FTA가 출범할 당시에도 농민들은 많이 빼앗겼는데 이번에 그나마 남아 있는 것마저 더 빼앗길 판이다. 농민들의 분노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정당하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쌀밥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거의 공짜로 먹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농민들에게 오랜 세월 빚을 져 왔다고 봐야 한다. 농민들의 희생으로 산업사회를 일구었고 농민들의 희생으로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번에 또 한 번 농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한미FTA 재협상 전략을 짜고 있다고 모두들 의심한다. 農者天下之大本! 맞는 말이다. 농업이 없었으면 근대화도 불가능했다. 지난 시절 저곡가 정책으로 도시노동자의 저임금이 가능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저임금이 수십 년 계속됐기에 자본은 안정적으로 살을 찌울 수 있었다. 農者天下之大本!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밥은 없다.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갚지 않으면 날강도 신세로 전락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불행해진다. 농촌의 황폐화는 식량주권의 상실로 이어지게 되며 그 뒤에는 외국계 곡물회사들이 우리의 목숨을 먹는 걸로 좌지우지 할 것이다. 우리가 더 살기 위해서라도 이제 공짜밥은 더 이상 먹지 말자. 쌀값부터 당장 사회적으로 보전하자. 개 사료값보다 쌀값이 싸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보니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