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훈의 잡설]관용 혹은 연대, 아직 먼 곳에 있다.

"수구언론의 활약으로 우리는 '칠레초석'을 얻었다" 김병훈 전 MBC논설위원l승인2017.11.18l수정2017.11.2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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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과 그 인근 지역의 지진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지껏 겪어보지 못 했던 큰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

진도가 어떻고, 규모가 어떻고 하는 수치(數値)를 넘어선 불안이 지진 발생 지역을 넘어 전국을 배회하고 있다. 한반도가 더이상 지진 안전 지역이 아니라는 말이, 이제는 진부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 김병훈 전 MBC 논설위원

발생일이 수학능력시험 바로 전날이어서 정부 당국은 다음날 치르기로 했던 수능 (순응으로 들려서 편찮은 줄임말이다) 시험을 일주일 뒤로 연기했다.

한 편에서는 정부의 조치가 신속하고 적절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재해지역의 주민들 가운데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살아 고작해야 가구 정도가 조금-물론 불쾌하고 불안하다- 흔들리는 미진(微震)만을 맛본 사람들마저도 '대체로' 시험 연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체로' 그러하다는 통계적 근거는 없다. 상식에 비추어 그렇지 않을까 짐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험 연기 조치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 저 조선일보가 앞장선, 형형한 눈의 비판적 매체들은 "'상식'이라는 것이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는 명제의 보편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지진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수험생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됐다고 언성을 높였다.

물론,이 매체들은 시험일을 늦춰선 아니 된다거나, 정부 당국의, 더 정확히는 '문재인 정권'의 그런 조치가 잘못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손해를 보게 된 사람들도 있다는 '팩트fact'와 그러할 것이라는 '가능한 추측'을 적절한 비율로 혼합해서 제시했을 뿐이다.

SNS를 비롯한 각종 공론의 장에는 예상대로-혹은 그 매체들의 기대대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하게는 "너희들 탓에 시험을 망치게 됐다."는 지진 지역 수험생들을 향한 원망과, 이런 몹쓸 결정을 내린 정부를 비난하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정부가 아무리 여러 유형의 '부수적 피해'를 예상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후속 조치들을 취한다 하더라도 이를 100%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일정한 수의 '부수적 피해자'들은 정권에 대한 힐난의 시선을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매체들이 원하는 게 이런 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대체로 내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굴러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비판의 기수'를 자임한 저 매체들의 삽질은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으니 그러려니 무시하는 게 낫다. 정작 안타까운 건 피해 지역 수험생들에게 원망과 저주의 욕설을 퍼붓거나 시험 연기를 반대하던 적지 않은 수의 '피해자님'들의 모습이다.
"내가 사는 곳에 지진이 나도 나는 의연하게 일정대로 시험을 치르겠다"고 그들은 나서겠는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하더라도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몫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갖춰야 할 연대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민주공화국을 완성하고 지탱하는 원리로서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에 집중하느라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한 연대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소홀했다는 자각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부의 이번 조치도 그런 맥락 위에 놓을 수 있을까.

이번 수능시험 연기라는 정부의 조치는 여전히 평등의 수위에 머물 뿐 연대와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상황의 변화 때문에 불이익을 겪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형평성과 공정성의 문제다. 이른바 '사정 변경의 원칙'이라는 개념에도 맥이 닿아 있다. 그래서 지진 피해와 동떨어진 지역의 건전한 이성을 지닌 수험생과 가족들이 시험을 연기하는 것에 쉽사리 반대할 수 없었던 게다.

연대의 경지에 도달하자면, 법률로 보장된 자신의 권리 일부까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을 덜어주는 활동에 동참했던 많은 시민들이 보여준 것은 온전한 연대의 한 모습이었다. 기름으로 오염된 해안의 자갈 하나까지 닦아주던 자원봉사자들과 여러 사회단체의 구성원들이 피해주민들과 형성했던 연대를 우리는 목격한 바 있다.

장애인 전문 교육기관이 동네에 생기는 것을 막으려는 추한 집단행동에 나서는 작태는 연대의 단순한 거부를 지나 평등에 기초한 공공성에 맞서는 불법이다. 눈에 불을 켠 주민 앞에 죄인처럼 무릎을 꿇은 장애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원했던 것은 배려와 연대의 정신이 아니라 정의, 그것이었다.

수학능력시험과 관련된 정부의 이번 조치는 적절했다. 수구언론의 활약으로 우리 사회는 새들의 배설물이 쌓여 만들어진 '칠레 초석'을 얻는다. 그 오물 더미에서, 아직은 요원한, 연대라는 가치를 꽃피울 소중한 거름을 얻는 경험과 지혜를 우리는 지녔는가.


김병훈 전 MBC논설위원  k70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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