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칠봉산 탐방

어제는 점심 먹고 너무 졸려서 잠시 눈 좀 붙이고 나설 참이었는데 깨고 보니 네 시가 넘은 데다 중간에 어머니로부터 국 먹으러 오라는 기별을 받은지라 속절없이 한나절이 날아가 버렸다. 긴 연휴의 20분의 1이 날아간 셈이다. 곁에서 졸면서 텔레비전 보던 아내도 석갑산이라도 다녀오자 하였다가 하는 수 없이 포기하였다. 아쉬움은 오랫동안 맴돌았다.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과 동동주를 제대로 한 잔 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욱 억울할 뻔했다.

하여, 마지막 휴일인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을 살피며 단단히 마음먹는다. 오전에는 출근하여 써야 할 글의 초안을 잡는다. 보도자료도 하나 보낸다. 기자들에게 문자도 돌린다. 12시 조금 못 미쳐 퇴근한다. 마음은 다급하고 약간 설렌다. 추석 연휴 전에 스스로 다짐한 것의 대부분을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집에서 아이와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한 나는, 물병 하나 달랑 들고 손수건 한 장 호주머니에 넣은 채 길을 나선다.

진양호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는 진양호 차고지까지 태워주어도 되었으련만 한 정거장 못 미친 지점에서 내리라 한다. 그 까닭을 모르겠다. 엠마우스 요양원, 경해여고, 진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 어린이 교통교육장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햇살은 가을을 무색하게 따갑다. 하지만 아주 자그마한 그늘에서도 태양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는 가을 쪽으로 기울어 있다. 다행이다.

어린이 교통교육장은 우리 아들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까지 참 자주 갔다. 주말만 되면 딱히 갈 곳이 마땅찮던 우리는 어린이 교통교육장에서 자전거를 태워주고 어묵과 달걀을 사주고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지인을 많이도 만났고, 덕분에 육아의 힘듦을 나누며 서로 위안삼기도 했다. 애비 노릇을 하게 해준 교통교육장은,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미소짓게 만든다. 젊은 아낙들은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과일을 깎아 먹으며 까르르 웃고 있다. 정겹다.

▲ (사진제공 = 이우기)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진양호는 1970년 길이 975m, 높이 21m로 건설된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인공호이다. 46m의 계획 홍수위에서 만수 면적과 총 저수 용량은 각각 29.4㎢와 3억 9200만㎥이며, 홍수조절 능력은 2억 7000만㎥이다. 남강댐의 유역면적은 2293.42㎢이며 유역 둘레는 328.01㎞이다. 1999년 10월 댐 보강공사가 완료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추가로 수몰되는 상류지역 주민들의 원망이 많았다. 댐 보강공사와 함께 새로 생긴 공원은 ‘노을공원’이라 하고 위쪽에는 물홍보관이 자리잡았다. 노을공원 맞은편 진주시능력개발원 옆에 칠봉산 등산로 입구가 있다. 눈여겨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 (사진제공 = 이우기)

2002~2003년 <경남일보> 사회부 기자 시절 남강댐관리단을 출입했다. 당시 큰비가 내려 진양호 물을 사천만으로 빼냈는데, 사천만에서 어업을 하던 분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진양호 물 때문에 바다 식생에 변화를 일으켜 큰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남강댐관리단은 1970년 처음 댐을 준공할 때 이미 보상을 완료하였노라고 잡아뗐고 어민들은 댐 보강공사로 인하여 민물이 더욱 많이 바다로 흘려들고 있으니 상황이 달라졌다고 분노했다. 노을공원에서 어민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고 기자들과 경찰들도 바빠졌다. 지리산 지역에 홍수주의보가 내려져 당장 사천만으로 물을 내려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어민들은 방수로를 점거한 채 요지부동이었다. 댐관리단 상황실과 경찰, 군부대까지 긴박하게 움직였다.

▲ (사진제공 = 이우기)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한국언론재단에서 지원하는 특별취재지원사업 같은 것에 ‘미국의 댐 현황’ 비슷한 주제로 응모하여 선정되었다. 나와 사진기자, 남강댐관리단 직원 1명을 묶어서 미국의 댐을 돌아보고 우리나라 물 부족 문제와 각종 민원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에 대해 특집기사를 쓰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2003년 9월에 실시한 구조조정 기간에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그 기사는 후배 기자가 맡아야 했다. 미안한 마음이 늘 남아 있다. 아시아레이크사이드호텔 위에 있던 팔각정을 무지막지한 굴삭기가 단숨에 무너뜨리던 장면을 내가 찍어 신문에 실은 기억도 있다. 그 팔각정 앞에서 아버지와 친구들, 동생은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흑백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진양호만 보면 생각나는 추억이 한둘이 아니다.

칠봉산을 가 보기로 한 건, 만날 강변도로에서 바라보던 그 산에서 신안동, 평거동, 판문동 쪽을 바라보면 어떤 모양일지, 칠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진양호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그런 것이 궁금하여서이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모습과 사뭇 다른 어떤 풍광이나 자연을 기대한 것이다. 봉우리가 일곱 개여서 칠봉산으로 부르는 게 당연하겠는데, 그 일곱 봉우리는 각각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던 것이다. 칠봉산이란 이름에는 아름답거나 무섭거나 어마어마하거나 한 전설이 꼭 있을 법한데 아직 들어본 적은 없다. 드디어 등산로에 발을 내디딘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산은 조금 가팔랐다가 편편하였다가 다시 내리막이다. 오르막은 숨이 찰 만하고 내리막은 지겹지 않을 만하다. 숨이 조금 가쁘다 싶으면 어김없이 긴 의자가 놓여 있어 1분씩, 2분씩 앉았다 일어서곤 한다. 소나무 사이로 청설모가 날아다니고 여러 새들도 자기만의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다. 사람은 간혹 한두 명씩 지나간다. 알록달록 잘 차려입은 여인에서부터 혼자 극기훈련하듯 걷는 중년 남자에 이르기까지 진주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진양호, 댐, 남강, 평거동, 판문동, 신안동, 아파트, 고속도로 들을 흘깃흘깃 바라보기도 하고 다리쉼을 할 적엔 사진을 찍기도 한다.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논과 밭이던 평거동, 판문동이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도시계획으로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겠지만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이야 그것을 일일이 알 수 없었고 안다 한들 무엇을 어찌 해볼 요량이 생기지 않던 것이다. 그렇게 넓은 들판이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는 동안, 수백년, 수천년 파묻혀 있던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없지는 않았을 터인데 누가 어떻게 발굴하여 어디에서 보관하며 연구하는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 뭐라 언급할 수가 없다. 상전벽해처럼 변해버린 익숙한 동네를 먼 거리에서 낯설게 내려다보니, 문득 시절의 무상함이 머리를 파고든다. 왜 그렇지?

▲ (사진제공 = 이우기)

칠봉산 일곱 봉우리 중 몇 번째 봉우리일까. 안내 표지판을 좀 정성스럽게 만들었더라면 좋겠다 싶을 즈음 전망대가 나타난다. 초등학생 꼬마 네 명과 그들의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두 명이 운동기구에 붙어 서서 재잘거린다. 참 정겹다. 흐뭇하다. 아이들 노는 모양을 보다가 강 건너 높다란 아파트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는다. 사는 게 이 맛이다. 아이들은 엄마를 졸라 돼지국밥을 먹을 기대에 웃음이 가득하다. 피자도 아니고 치킨도 아니고, 돼지국밥에 침 흘리는 아이들은 처음 본 듯하다.

약수암은 내가 진행하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내려가면 오도카니 앉아 있다. 약수암은 사연이 두 개나 겹친다. 신혼 시절 신안주공 1차 아파트에 살 때 아내와 나는 약수암에 물 뜨러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때는 희망교가 없던 시절이어서 천수교를 건너 우회전한 뒤 망진산 밑 철길 아래 길을 부지런히 달려 진양호 방향으로 내처 가다 보면 약수암 이정표가 보였다. 약수암은 칠봉산 중간 허리쯤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과 흘러가는 세월을 무심한 듯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약수암에 오르자면 자동차 1단 놓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아야 했다. 보살님은 지나가는 말로 초파일에 등이라도 하나 달라고 했고, 가난한 우리는 그 말이 부담되어 발을 끊었다.

2012년 아버지 돌아가신 뒤 진주시 미천면 집현산 성불사에서 사십구재를 지낼 적에 불경 외는 목소리가 유명 성우 뺨 칠 만큼 구수하던 늙은 스님이 오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약수암에 계신 무슨무슨 스님이라고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자주 가서 안면도 트고 법당 안에 연등도 하나둘 달아줄 것을 왜 그때는 그런 것이 인연이라는 것인 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일까. 참 바보스럽고 더 가난하던 시절을 되짚어 본다.

▲ (사진제공 = 이우기)

등산길은 약수암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끝난다. 대숲 사이에 이름을 잊어먹은 절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 때문에 정신도 집중하기 어렵고 발걸음도 허공을 딛는 것 같아 멍하기만 하다. 고개를 들면 휴먼빌 아파트가 딱 막아선다. 등산이 끝났다는 신호다. 신호 치고는 무지막지하다. 아파트 단지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내동초등학교 앞 육교를 건넌 나는 다시 희망교를 걸어간다. 우리 아파트 앞까지 나를 데려다 줄 352번 버스가 지나가건만 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장딴지가 땡기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시지만, 기왕 나선 걸음, 집에까지 걸어가자 작정하고 걷는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가 희망교 난간 사이에서 손짓한다. 희망교를 건너는 차들이 묻는다. “희망은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 (사진제공 = 이우기)
▲ (사진제공 = 이우기)
▲ (사진제공 =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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