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 생각도 끝이 없어 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제대로 근무하고 저녁까지 알뜰하게 즐긴 주의 끄트머리였더라면 언감생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전에는 출근하여 밀린 일을 좀 정리한다. 8일 만에 사무실 문을 여니 모든 게 낯설게 보인다. 컴퓨터가 제대로 켜지는 게 좀 신기하다. 사무실 문 비밀번호와 컴퓨터 비밀번호를 기억해 준 손가락에게 감사한다. 내 일이란 게 어차피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전으로 일단 마무리한다. 한의원 들렀다가 집에 누워 있는 아들 점심을 챙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등산화 끈을 조인다. 바위 같은 졸음이 밀려오지만 애써 떨쳐낸다. ‘니 까짓게 뭔데?’ 이런 생각도 한다.

120번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 중앙을 관통하여 옛 법원 앞에서 내린다. 뒤벼리 건너편은 부산스러워 보인다. 오늘은 선학산을 탐방하는 날이다. 마음부터 설렌다. 선학산(仙鶴山)이라. 신선과 학의 산이라. 얼마나 마음 설레는 이름인가. 법원 옆 골목을 벗어나 테니스장, 청락원이 있는 모덕공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산을 올라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연암도서관에서 나오는 또래의 남자에게 등산로 입구를 물었더니 더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50m 더 들어가다가 인근 배밭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에게 물었더니 더 들어가라고 한다. 50m쯤 더 들어가니 공동묘지가 보이고 비로소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벌써 땀이 밴다. 공동묘지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 (사진제공 = 이우기)

무덤들은 무덤덤하다. 거기엔 슬픔도 없고 애처로움도 없으며 비애 따위도 없다. 애달픈 사연들은 죄다 녹고 삭고 닳고 깎여버린 듯하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무덤은 거의 없다. 1970년대에 세운 빗돌은 풍상에 닳고 추억에 깎여 글씨가 희미하다. 상석에 새긴 글은 한글도 있고 한자도 있다. 추석을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인지라, 몇몇 무덤 앞 종이잔에 소주가 담겼고 새로 갈아놓은 붉고 노란 조화(造花)들이 그나마 후손의 정성을 증언해 주고 있다. 좁다란 산길에 접한 무덤들은 한 귀퉁이를 등산객들의 발길에 내맡겨 버렸고 숫제 봉분 모양마저 가늠하기 힘든 것도 여럿이다. 선학산 전망대 주변에 도시숲을 조성하니 올해 말까지 무덤을 이장해 가라는 진주시의 안내표지가 섰다. 주인을 잃었거나 주인이 잃은 미확인 무덤이 절반은 넘는다. 죽은 사람의 귀신도 죽어버린 공동묘지, 그나마 봉분마다 벌초라도 해 놓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이러한 무덤 앞에서는 무서움은커녕 삶과 죽음을 넘어버린 엷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죽은 지 30년, 40년이 지나면 그리움도 무뎌지고 서글픔도 사라지고 사무침도 어색해지는 것일까. 무덤과 무덤 사이로 난 미끌미끌한 길을 요리조리 조심하며 오른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미끌미끌한 것이다. 운 좋으면 돌멩이나 나무뿌리를 디딜 수 있고 더 운 좋으면 맑은 날 오를 수도 있겠지만 어쩌다 보면 쏟아지는 빗속에서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돌아보니 혁신도시 건물들이 낮은 구름 아래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 길을 선택했을 땐 바로 발 아래 뒤벼리를 내려다볼 생각까지는 아니하였지만, 적어도 남강에 비친 경남문화예술회관은 보겠다 하는 짐작이 없지 않았고 욕심을 더 부려 본다면 진주교와 촉석루까지도 한 렌즈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더랬다. 하지만 그건 나의 욕심이다. 벼랑 쪽으로 나 있었을 등산로는 위험과 산림훼손을 이유로 폐쇄됐고 공동묘지 사이로 난 길에서는 나뭇가지에 가려 남강도, 예술회관도, 진주교도, 촉석루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아쉽다.

▲ (사진제공 = 이우기)

드디어 선학산 전망대에 오른다. 두 번째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소개해 놓은 내용을 옮긴다. ‘선학산은 135.5m 고도의 낮은 산으로 길이 완만해 오르기 편한 곳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남강과 진주시내가 한눈에 보여 전망이 좋고, 시가지 접근성이 좋아 이곳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선학산 전망대는 산 정상에 124.21㎡ 규모의 2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화장실 및 휴게실이 있고 2층에는 전망 데크가 들어서 있다. 특히 이곳은 진주시만의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 좋은 장소로 유명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덧붙일 말이 없는 듯하다. (진주를 전주로 한 번 써 놓았는데 고쳐 옮긴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집에서 나설 때가 오후 2시였고 버스에서 내릴 때가 2시 30분이었는데, 전망대에 서니 3시 10분이다. 그리 힘든 길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망대에서 땀을 닦고 물을 마신다. 점심으로 먹은 라면 국물과 지금 마신 물이 뱃속에서 출렁거린다. 기분 얄궂다. 축제가 한창인 진주교 방향으로 향하여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그것을 배경으로 내 얼굴도 스스로 찍는다. 거기에선 다들 그렇게 한다. 뒤돌아보면 혁신도시와 월아산 장군봉, 국사봉이 보인다. 여기에선 진주시내 곳곳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말 그대로 전망대로서는 최고다. 지도를 보면 선학산에 오르는 길은 거미줄처럼 많고 복잡하다. 특히 상대, 하대, 초장동 쪽에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부부끼리 온 사람, 연인끼리 온 사람, 개를 끌고 온 사람, 색안경을 끼고 온 사람, 비싸 보이는 사진기를 메고 온 사람, 얼굴이 쭈글쭈글한 사람, 머리카락을 노랗게 염색한 사람, 단풍보다 더 붉은 옷을 입은 사람, 입마개를 하고 온 사람 들이 전망대에서 경쟁하듯 사진을 찍고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물을 마시고 웃고 떠든다. 개는 짖는다. 10분쯤 섰자니 땀이 식고 다리에 힘이 생긴다. 단 1초도 의자에 앉지 않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처음에는 봉황교까지만 갈 생각이었다. 며칠 전 멈춘 지점까지만 이어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선학산 전망대에 오르고 보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던지라 내처 비봉산까지 가보기로 한다.

▲ (사진제공 = 이우기)

한데, 생각해 보면 너무나 뻔하여 찾아보거나 물어볼 것도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여,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옆에 선 사람에게 봉황교 가는 길, 즉 비봉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묻는다. 어물어물 가르쳐 주는데 미덥잖다. 그러고 있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나도 어룽어룽 가르쳐 준다. 길 잃을 염려가 없는 곳이어서 그 정도로 해 두어도 될 만하다. 다시 길을 나서 봉황교를 건넌다. 일단 목적은 이루었다. 봉황교에 서서 시내 쪽도 찍고 초장동 쪽도 찍는다.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도 찍는다. 이로써 진주여고 사거리에서 시작한 비봉산~선학산 답사가 완성된 것이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오르막은 고만고만하고 내리막도 위태롭지 않아 걷기엔 그만인 길을 그대로 두고 가기 아쉽다. 비봉산 정상을 바라보고 되밟아 가는 길은 즐겁다. 간혹 지나가는 트럭은 위험하지 않고 넓은 길은 시원시원하며, 끊기지 않고 들려오는 새들의 합창도 감미롭다. 오른쪽과 왼쪽에 보이는 풍경을 비교하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의곡사로 내려선다.

의곡사는 665년(신라 문무왕 5) 2월 혜통조사(慧通祖師)가 창건하여 월명사(月明寺), 숭의사(崇義寺)라고 불려 왔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는 이 절에서 승병들을 양성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진주성이 함락된 뒤에도 계속 승병들이 모여들어 이 절을 중심으로 항전했다. 당시에는 관항사(觀項寺)라 불렀는데, 승병들의 항전을 기려 나라에서 의곡사(義谷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의곡사라는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 의곡사라 개칭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1618년(광해군 10) 목사 남이흥(南以興)이 주지 성간(性侃)을 도와 중건하였다. 그 뒤 1879년(고종 16) 덕운(德雲)이 중수했고, 1898년(광무 2) 석종(石宗)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디지털진주문화대전)

▲ (사진제공 = 이우기)

의곡사는 고즈넉하다. 자그마한 절 의곡사에서 잠시 회상에 젖었다. 엊그제 그 딱따구리는 아직도 나무 등걸에 둥지를 만들고 있다. 진주중학교 다니던 1980년대 초 친구들과 이곳을 몇 번 왔다. 왜 왔던 것인지 기억에 없다. 초파일에도 왔고 그냥 일 없이도 왔던 것 같다. 큰 절도 아닌데 신도들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던 절인데 올 때마다 까닭없이 몸도 마음도 차분해지고 경건해지는 것이었는데, 오늘 느낌은 가장 수수롭다. 나이가 든 때문일까. 의곡사 아래 사하촌(寺下村)은 발전이라는 개념과 담 쌓고 사는 것 같다. 1층 슬래브 지붕 위에 가건물을 올린 집이 여러 채 보인다. 늙수그레한 아지매들이 몸빼를 입은 채 길바닥에 퍼질러앉아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절 아래 풍경치고는 생각 밖이다. 그 와중에 의곡사에서 비봉산 꼭대기 쪽으로 콘크리트 포장길을 만드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의곡사 근처에 추억을 남겨둔 분 이야기를 몇 가지 옮겨 놓는다. “저 곳이 개발이 더딘 이유가 땅의 소유가 진주고인데 점유를 하고 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지 않는 배려(?) 때문에 새로 신축은 허용하지 않고 보수 정도는 용납해 주어 점유한 사람이 완전 이주하기 전에는 허물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명도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친구는 서울로 가서 살아도 진주에 오면 그 집에서 잔다고 하더군요.”(이정주 님)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 와서 봉래초등 담벼락 밑에서 구슬치기하며 놀았습니다. 진주중 다닐 때 의곡사 가본 적도 있습니다. 이 동네는 정말 변화가 더딥니다.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곳은 드물지... 그런 대로 옥봉동, 봉래동이 옛날 모습을 조금은 유지... 의곡사 뒤 샘터가 있어 자주 친구들과 같이 가서 샘물 마시고 의곡사 밑에 사는 친구 녀석 집에 가서 개네 엄마가 파는 꿀에다 산딸기 넣어 딸기주처럼 마셨던 기억이... 의곡사와 비봉산 뒷산에는 산딸기 밭이 많아 산딸기를 다라이째로 사서 먹었던 기억도 있고...”(이명균 님)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전깃줄과 담벼락과 슬레이트 지붕이 부조화를 이루는 동네를 뒤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의곡사 주변 풍경은 낯설다. 진주중학교의 앞과 진주고등학교의 뒤를 번갈아본다. 다시 걷는다. 진주여자고등학교의 뒤와 비봉산의 앞에서 길을 걷는다. 길은 끝이 없고 생각도 끝이 없다. 굴밤 하나가 머리 위에서 투둑 떨어져 뒹구르르 몇 바퀴 굴러가다 멈춘다. 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