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궁핍함이 아내를 저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제주도에 갔다. 3박4일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도 준비하는 내내 가족들 눈치 보느라 안절부절이었다. 하필이면 이번 주는 주중인데도 연일 민박손님이 많아 내게 특히 미안해하는 눈치다. 카페 보는 며느리를 대신해 손녀를 봐주어야 할 때가 더러 있는데 그 일을 돕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미안해 며느리 대하는 눈치도 달랐다. 이런저런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 가득 채워놓고, 일일이 반찬목록을 만들어 주고 아내는 떠났다. 나는 그저 전기밥솥에 밥이나 하고, 찌개나 국물 따위를 데워서 반찬통과 함께 내놓으면 될 일이다. 가을걷이도 거의 끝냈고, 곶감마저 깎아 걸었으니 손녀도 내가 봐주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일을 마치고 어두워 밤차로 출발할 때까지 얼굴을 펴지 못했다.

▲ 김석봉 농부(전 녹색당 대표)

"미안해요. 나만 가서... 손님도 많은데..." 새벽에 아내가 내게로 돌아누우며 말을 건넸다. ‘차암, 그런 생각 좀 하지 마...’ 나는 혀를 찼다. "보름이에게도 미안하고... 내 대신 ...서하 좀 봐줘요..."  "별 걱정을 다 한다. 얼굴에 그거 병원에나 가봐..." 벌레에 물렸는지 아내의 얼굴 언저리에 종기처럼 돋은 상처가 마음에 걸렸다. "반찬은 충분할 거고..." 아내는 연신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을 표하고 있었다.

아내를 보내놓고 홀로 누워 그런 아내를 생각했다. 2년 쯤 전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으니 자주 가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미안했을까. 넉넉하지도 않게 용돈을 챙기면서는 왜 그렇게 어깨를 펴지 못했을까. 나와 함께 살아오면서 몸에 밴 궁핍함이 아내를 저런 모습으로 만들었구나 싶어 심사가 어지러웠다.

문득 아내의 얼굴에 아랫집 할머니가 겹쳐졌다. 나는 아랫집 할머니를 볼 때마다 너무 미웠다. 허리는 굽어 이마가 땅에 닿을 듯하고, 손가락은 마디마디 뒤틀려 그동안 살아온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건만 날만 새면 삭정이 같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밭으로 가신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할머니의 노동은 쉴 날이 없었다.

할머니의 노동이 밉게 느껴지는 이유는 너무 악착스럽게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해서 얻은 모든 것을 도시에 사는 아들과 딸에게 보내버린다는 것이다. 여름 휴가철이면 아들과 딸들이 찾아와 마당에 차양을 치고 밤새 북적거렸고, 김장을 할 때면 김치통 수십 개가 마당에 가득 찬다는 것이다. 몸이 쇠약해지는 만큼 수탈당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말 넌더리나게 보기 싫었다.

나는 가끔 다녀가는 할머니의 아들과 딸들도 할머니만큼이나 미웠다. 고주망태가 되어 형제간에 싸움이 나서 마당이 시끌시끌하기도 했고, 이웃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들이 다녀간 뒷날은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더욱 미워보였다. 끙끙대며 끌고 오는 손수레를 받아 끌어드리기도 싫었다. 경로당에 나가 쉬는 다른 할머니들이 훨씬 고와보였다.

"고생 많지요... 미안해..." 저녁나절에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걱정말고... 얼굴에 그거 병원은..." "몸이 피곤하면 생기는 대상포진인가 통풍인가 뭐 그런 거라고 하네..." "뭐라... 대상포진? 통풍?" "별 거 아니래... 아직은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래..." 놀라는 내게 아내는 태연하게 말했다. 병원에 가기는커녕 주변 사람에게 듣고 진단한 것이겠지. 자기 몸이 망가진 것보다 가족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게 더 미안했을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이렇게 살면 아내는 끝내 아랫집 할머니처럼 늙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픈 허리는 더 심해질 것이고, 나이는 들어가지만 노동의 강도는 더 거세게 몸을 짓누를 것 같다. 나는 수신(修身)도 제가(齊家)도 못한 채 그저 그런 촌로가 되어 잔소리만 늘고. 잔병치레로 짜증을 부리며 살게 되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조심하고 조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서로 마음이나 상하지 않으면 이리 산들 어떠며 저리 산들 또한 어떻겠는가. ‘비행기 엔진에서 타는 냄새가 나 김해공항으로 회항...’ 들려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지만 사랑하는 아내여, 당신은 저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니 잠시나마 행복한 여행을 즐기시게. 만사는 내일 일이니 다 내려놓고 지금은 한껏 가벼워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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