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녹지공원, 느릿느릿 걷기의 명소

오전 9시에 한의원에 들른다. 긴 연휴 중간 중간 문을 연 한의원이 고맙다. 한두 번 만에 싹 낫는 방법이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특히 한의원은 오랜 기간 꾸준히 침을 맞고 부황을 놓아야 하는 것이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이런 통증은 낫는가 싶다가 더 심해지고 그런가 하면 또 괜찮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소주 병을 손목 힘을 이용하여 잽싸게 비틀어 돌려 병 안 술에 회오리를 일으키는 장난을 치다가 손목에 이상이 생겼다. 열 번 정도 침 맞고 뜸 뜨고서야 나았다. 허리가 좋지 않아 한의원을 찾은 적도 있다. 한의사는 말했다. “가까운 낮은 산을 천천히 걸어보면 좀 좋아질 수 있다. 무리하지는 말고. 수영도 괜찮은데….” 숙호산, 석갑산을 자주 찾아가기 시작한 계기다. 허리는 웬만큼 좋아졌지만 언제 도질지 모르는 것이어서 늘 긴장하고 산다.

올 2월부터였던가 보다. 틈만 나면 가까운 산에 올랐다. 꼭 1시간이면 충분했다. 경상대에서 가좌산으로 올라가 천수교 쪽 망진산으로 내려오거나 희망교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밟은 적도 있다. 누구와 같이 가면 신경이 쓰여서 싫다. 미리 계획하고 이것저것 준비하여 챙기는 것도 상그럽다. 그냥 혼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라디오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날그날의 뉴스를 정리한다. 너무 멀어도 싫고 너무 높아도 힘들다. 물병 하나 들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그만이다. 보통 그렇게 산책도 아니고 등산도 아니고 더구나 운동도 아닌 그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어 보았다.

한의원에서 나와 케이비에스 진주방송국 앞 건널목을 건넌다. 곧장 집으로 오면 십 분이면 된다. 하지만 나는 신안동 녹지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냥 걷고 싶어서이다. 일찌감치 한의원에 다녀온 것은 미처 다 답사하지 못한 선학산 때문이었는데, 날씨가 애매해졌다. 우산 하나 울러매고 케이비에스 위쪽 육교에서부터 ‘진주문고’까지 삼십 분 정도 걷는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따갑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돋아난다. 그런 감촉이랄까 촉감이랄까, 그런 건 기분 좋게 한다. 진주문고를 가는 길은 늘 즐겁다. 늘 설렌다. 책을 사지 않아도 그렇고 찾던 책을 사게 되면 더욱 기쁘다.

신안 녹지공원은 신안동, 평거동에 사는 사람들에겐 보물이나 다름없다. 나무와 잔디가 조화롭다. 군데군데 정자가 서 있고 물 마실 곳도 마련돼 있다. 지압을 할 수 있는 길도 조성해 놓았다. 시민들 위한 섬세한 배려가 돋보이는 곳이다. 하대동 주민들이 시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심코 걷다 보면 시비(詩碑)를 만날 수 있다. 2000년 12월 국제로타리 제3590지구 진주 제일로타리클럽이 창립 5주년 기념사업으로 진주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데 일조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경상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진주 출신 근대시인 중 최계락 시인의 ‘해 저문 남강’과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선정했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이곳 녹지공원에서는 음악회도 자주 열린다. 올 8월에는 신안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한 여름밤의 영화제’를 열었다. 벌써 13회째라고 한다. 또 주민자치위원회는 해마다 알뜰나눔장터도 연다. 차의 날 선포 30주년 기념비도 있다. 그 옆에서 ‘진주시민과 함께하는 진주남강 달빛차회’라는 행사가 지난해와 올해 열렸다. 주민들과 함께하는 공원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 (사진제공 = 이우기)

나는 이 길을 자주 걷는다. 천수교~진주교~경남도문화예술회관으로 이어지는 망경동 공원과 함께 느릿느릿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팔짱 끼고 걷는 젊은이들, 유모차 밀고 가는 늙은이들, 앞뒤로 손뼉을 치며 걷는 중늙은이들, 강아지 몰고 나온 귀여운 아가씨들, 책가방 맨 채 뛰박질하는 초등학생들, 나처럼 할 일 없이 아주 천천히 걷는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들이 무람없이 걸어다닌다. 꽃이 보이면 꽃을 찍고 열매가 보이면 열매를 찍고 길이 깨끗하면 길을 찍는다. 사진기 방향을 돌려 내 얼굴도 찍는다. 그 어디에서 찍은 것보다 얼굴이 해끔하게 잘 나온다. 봄에도 걷고 가을에도 걷고 겨울에도 걷는다. 여름엔 주로 밤에 걷는다. 걷다 보면 아는 사람 한둘 만나기 십상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기 팔구이다.

▲ (사진제공 = 이우기)

조용필 노래, 나훈아 노래 아무것이나 흥얼거리며 걷다 보면 녹지공원은 끝나고 근처에서 짜장면 냄새, 아귀찜 냄새, 돼지갈비 냄새가 엷게 번져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 무시하고 ‘진주문고’에 가서 책도 보고 책 사는 사람도 보고 놀다가 나온다. 책을 사는 날도 있고 사지 않는 날도 있다. 아무래도 괜찮다. 녹지공원 끝자락에(반대로 가면 시작하는 즈음에) 책방이 있어서 참 좋다고 생각한다. 이날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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