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책임 묻기보다 사회구조와 환경부터 돌아봐야

아침 출근길에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앞서가는 몇몇 학생들 가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연초록 가방보에 빨간색 테두리를 둘러 ‘30’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 ‘학교 앞이니 30킬로 속도제한을 지키라’는 뜻이라는 걸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보도된 기사를 보니 경상남도교육청이 10월30일부터 ‘스쿨존 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학교앞 제한속도 지키기 캠페인이라고 한다. 진주에서는 마흔다섯개 초등학교가 참여했고, 가방덮개는 경남교육청이 개발해 행정안전부 장관상도 받은 아이디어 제품이라는 상찬도 눈에 들어왔다.

일단 좋은 일이다. 어린이 교통사고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 서성룡 편집장

하지만 작은 체구에 무겁게 둘러맨 형광색 가방 위에 둘러쳐진 빨간 테두리가 ‘제발 속도좀 지켜달라’고 나약하게 외치는 듯 하여 마냥 보기 편하지만은 않았다. 안전을 위한 작은 조치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약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한 마음도 생겼다.

비약하자면 성폭행 방지를 위해 몸매가 드러나는 옷이나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고 충고하고, 졸음운전을 경고하는 장난스럽고 유치한 고속도로 표지판 경고문구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다.

양극화를 비롯한 많은 사회문제를 너무 쉽게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데 다들  익숙하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고, 그 중에서도 교통 약자인 보행자 사망률이 유독 높은 이유가 단순히 한국 사람들이 안전 문제에 둔감하기 때문은 아니다.

세계에서 1,2위를 다투는 높은 성범죄율도 한국의 피해자들이 옷을 더 야하게 입거나 조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문제에 대한 진단이 틀리면 해법도 잘못되기 마련이다.

노동자들이 크레인 사고로 숨지고 선박 도색작업 도중 불의의 폭발사고로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에서 언제나 진단과 해법은 안전불감증과 현장 지도감독의 소홀로만 결론지어진다. 그리고는 사고가 또다시 반복된다. 졸음운전 버스에 의한 사망 교통사고도, 작업현장의 산재사망사고도, 성폭행 사건이나 어린이 교통사고도 줄어들 것이란 전망을 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그저 ‘더 조심하라’는 말 밖엔 하지 않는다.

10년만에 집에 TV가 생겨서 딸아이가 뒤늦게 드라마 ‘도깨비’에 빠져있는 요즘. 호기심에 함께 드라마를 보는데, 영 심기가 편치 않았다.

주인공 김고은 주변에 등장하는 재벌 3세의 비싼 외제차와 호화로운 낭비벽은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 언니의 딸을 양육하는 이모 가족의 탐욕은 단죄해야 할 죄악으로 그리는 장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남편도 없이 자녀 둘과 언니 딸까지 양육을 책임져야 할 주인공 이모의 돈에 대한 목마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탐욕으로 치자면 아무 직업도 없는 20대 놈팽이가 재벌가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비싼 외제차 굴리며 카드를 마음대로 긁으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잘못된 탐욕 아닌가.

하지만 드라마는 호화 저택에 사는 재벌 3세의 방탕한 생활은 당연하게 그리고, 힘겹게 사는 이모의 탐욕은 희화화하고 조롱한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고정된 환경이고, 그 안에 사는 개인들은 적응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강요되고 있다.

매일 출퇴근하는 남해고속도로 터널 입구에는 볼 때마다 아연실색하는 경고문구가 있다. “깜빡 졸음, 번쩍 저승”.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교통사고 사망자의 죽음을 희화화 할 뿐 아니라, 모든 사고 책임을 운전자 당사자에게만 지우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그 문구를 대형 현수막으로 제작해 산 위에 걸어 놓는 동안 세금으로 월급 받아 생활하는 한국도로공사의 그 많은 임직원들은 한 번도 교통사고 문제가 국가와 사회에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버스나 화물트럭 운전자들이 목숨을 걸고 졸음과 싸우며 운전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우리 사회의 책임과 운전노동 시간을 법으로 강제하지 않고 업체와 노동자간 자율계약에 맡겨 놓은 국가의 책임 방기를 말이다.

원인을 알지만 그 원인을 말하고 대안을 말하기를 다들 두려워 한다. 언론이 특히 그렇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자기 목숨 챙겨가며 조심조심 일하기엔 너무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사실. 자본은 쉴 틈을 주지않고 우리의 시간을 관리하고, 너무 많은 시간 부려먹는다는 사실.

성에 의한 차별, 출신 국가와 소유 재산, 학력과 직업에 따라 지독히 차별하고 멸시하는 문제가 결국 폭력과 혐오로 이어진다는 사실.

제한속도를 적어 놓은 책가방 덮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과 함께 학교 주변 교통환경에 문제는 없는지 더 살펴야 한다. 아직도 지역 초등학교 주변에는 인도가 없거나 안전시설이 없는 도로가 허다하다. 차도를 좁혀서라도 학교 주변 등굣길은 확보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통 약자가 더 조심하는 방법보다는 교통 강자인 자동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근본 원인을 짚지 못하면 문제는 계속 맴돈다.

토지나 주택, 공공재에 대한 개인의 소유를 통제하고, 약자들의 조직률을 높이고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 돈 때문에 비굴해지거나 돈으로 행패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막대한 손해를 보게 해야 한다.

약자에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더 많이 가진 자, 더 힘이 센 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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