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인터뷰, 진주에서 강연펴는 인권활동가 박래군

인권활동가 박래군 씨가 24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산학협력관 대회의실에서 ‘2017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제로 강연을 연다. 

박래군 씨는 1988년 동생 박래전 씨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뒤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8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및 정책실장, 다산인권재단 상임이사, 인권잡지 '사람'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인권재단 '사람' 소장,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에바다복지회 이사, 4.9통일평화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양심수 석방, 고문 추방,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부터 주거권, 최저임금, 비정규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인권의 지평을 넓혀 왔다.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운동, 용산 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회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4·16연대’ 상임운영위 등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구속되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성을 다하고 있다.

‘단디뉴스’는 24일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서 열리는 강연에 앞서 인권활동가 박래군 씨를 인터뷰했다.

▲ (사진 제공 = 형평운동기념사업회)

Q. 안녕하세요. 선생님. 강연 차 진주를 방문하시는데 진주에는 처음 오시나요? 진주와 특별한 인연은 없으세요?

A. 진주와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요. 허허.. 형평운동에 대해서 간략히 알고 있고, 진주에 잠깐 방문한 적은 여러 번 있습니다.

Q. 오늘 진주에 오셔서 강연을 하시는데, 인권이 참 폭넓은 개념이죠. 최근에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나요? 그리고 오늘 진주에서는 어떤 강연을 하실 생각이세요?

A. 최근에는 세월호 관련한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있고요. 작년 촛불집회 때부터 강연을 나가 인권과 우리 사회의 민주적 변화를 연결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어요. 오늘도 아마 촛불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말하게 될 것 같네요. 요즘 우리 사회에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이 인권 목록을 많이 얘기해요. 노동권이 있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고 이런 식의 나열들. 그런데 인권이라는 게 탄생하고 발전해 온 과정은 억압과 차별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이었어요. 이런 원칙, 정신을 잃고 인권의 목록만을 얘기하는 건 알맹이는 빼고 껍데기만 이야기하는거죠. 우려됩니다. 법이나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닌 인권이 실현되는 구조, 사회 시스템, 문화인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토양을 만들려면 인권과 민주주의가 함께 가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 하게 될 것 같아요.

Q. 세월호 집회와 관련해 몇 년 전 집행유예 4년을 받으셨는데, 그동안 벌금형까지 합하면 12번 이상 처벌을 받으신 걸로 압니다. 선생님의 활동내역을 보면 용기랄까? 그런 것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요. 구속과 처벌까지 감내하시면서 인권운동에 열성을 다하는 동기가 있을까요?

A. 제가 인권운동가로 활동해온지 어느덧 29년이 됐는데, 제 동생(박래전 씨, 당시 숭실대 재학생)이 1988년에 광주학살의 원흉들 처벌하자며 분신자살을 했거든요. 제 동생을 묻으며 제가 했던 약속이 “네 몫까지 새로운 세상,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고요. 그리고 사람들, 인권운동가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힘 없고 약한 소수자들이잖아요. 이런 사람들의 변화가 제게 힘을 줘요. 이 사람들과 연대해 나오는 작은 성과들, 또 그들에 대한 신뢰가 힘들 때 저를 끌고 가는 힘이 돼 주어요.

Q. 88년부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셨고, 50여명에 달하는 열사들의 장례식에 참여하시기도 했는데요. 이 때문에 당시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명도 얻으신 걸로 압니다. 그 당시 느꼈던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 그리고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상황에서의 변화에 대해 체감하시는 부분이 있다면요?

A. 한 분 한 분이 중대결심(자살)을 할 때는 절박한 심정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한편으론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열악한 상황이 있는 것도 같아요. 억압하고 짓누르는 폭력적 구조의 힘.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당하는 상황, 그런 상황들이 당시에는 많았죠. 그래서 결단을 하고 몸을 던지기도 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죽음들이 역경을 돌파하는 데 큰 힘이 됐죠. 하지만 지금은 개인의 결단, 죽음이라는 걸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옛날만큼 많지 않아요. 사회적 영향도 이전에 비해 축소됐고요. 언로가 많이 열리고 민주주의도 진전됐잖아요. 그러니 개인적 결단보다 함께 하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운동하시는 분들이 자신의 생명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도 인권적 차원에서 소중합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생명들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쪽으로 바뀌었으면 하고, 바뀌어가는 것 같아요.

▲ 인권활동가 박래군 씨가 24일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서

'2017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제로 강연을 편다.

(사진제공 =형평운동기념사업회)

Q. 소설가를 꿈꾸셨고, 81년에 ‘땅강아지’라는 작품으로 연세문학상을 수상하셨죠. 가끔 돌아보면 소설가로서의 꿈이 다시 생각 날 때는 없으세요?

A. 저는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돼서... 소설을 못 썼죠. 책에서도 밝혔지만 60살이 되면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뭔가 써야할 것들을 써야 할 것도 같고. 그게 또 제 역할일 수도 있겠죠. 운동 일선을 떠나서 스스로 써보고 싶었던 것을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진보운동도 혁신이 필요하다고 믿어요. 진보운동이 시대적 변화나 흐름에 뒤쳐지는 부분도 느껴져요. 혁신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사람이 바뀌어야죠. 선배들이 떠나주고 후배들이 중심이 돼 시대변화에 부응해야죠. 제가 그 물꼬를 터봐야겠다고도 생각해요.

Q. 2015년 UN인권보고서를 보면 157개국 중 우리나라 인권 순위가 58위에 불과해요. 돈과 인권이 꼭 함께 가지는 않지만 1인당 GDP 28위를 기록하는 우리가 왜 이렇게 인권 후진국인지 의구심도 드는데요. 선생님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A.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죠. 하지만 그간 인권친화적인 정치질서, 환경을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전두환 때까지는 군사독재였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과거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죠. 그들이 여전히 부와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편성을 갖는 가치인데도 여기에 불순한 기득권 세력이 있어요. 이들은 심지어 UN인권위의 주장을 전달해도 그걸 좌파논리라며 비난합니다. 김대중 정부 후 일부 진전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일시에 뒤집어졌죠. 저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사회권 영역에서의 인권이 걱정됩니다. 사회권 영역은 부의 재분배와 깊숙이 연결돼 있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약자, 소수자를 위한 복지에 많이 투자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장애인 학교를 짓겠다는 데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와요. 인권에 반하는 거죠. 이런 걸 바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살아왔던 거죠. 그래서 우리의 인권 수준이 낮은 걸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순위가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인권 수준이 중요합니다. 자유영역과 함께 평등영역이 발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이를 극복하는 게 앞으로 중요하죠.

Q. 시대변화에 따라 인권문제도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여성 문제, 소수자 문제, 청소년 인권 문제,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선배 인권활동가로서 새로운 인권활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A.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소수자는 지금도 있고, 점차 등장할 것입니다. 이제 곧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가 되겠죠. 후배들, 또 소수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그들이 권리를 찾고 보장받는 사회가 될 것이란 것입니다. 그게 인권의 역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당장 눈앞의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멀리 보고 나가자고 말하고 싶어요. 성 소수자 운동, 장애인 운동 다 이전보다 많이 성장했습니다. 20~3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죠. 그 성장 속에서 이전보다 더 많이 우리 사회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가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오셨고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신 부분도 많은데 그 과정에서 가장 보람된 점, 그리고 가장 아쉬웠던 것 한 가지씩 말씀해 주신다면요?

A. 뭐.. 보람있는 일들도 많고요.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고문이 없어졌잖아요. 이런 일이 보람이고요. 함께 싸워가며 국가인권위를 만든 것도 큰 보람이죠. 지금은 좀 변질됐지만... 지금도 아쉽고 가장 한스러운 것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다는 거죠. 2004년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기회가 왔는데 그때 실패했죠. 국가보안법은 단순한 하나의 법률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 발전, 성장 이런 것을 가로막는 구조, 체제 같은 것이죠. 그걸 깨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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