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봉의 산촌일기>"사랑하는 이여, 밭에 나오지 마시게"

"꽃향기에 취하고 손녀딸 재롱에 몸을 맡기시게" 김석봉l승인2017.10.11l수정2017.10.1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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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좋은 계절이지만 농부에겐 힘든 철이다. 그렇잖아도 저녁잠은 늘고 새벽엔 일찍 깨는데 들일에 지친 가을엔 그게 더하다. 밥숟갈 놓고 방바닥에 몸을 뉘면 그냥 잠들기 일쑤다.

잠시 잠들었다 눈을 떠 일어나 양치질하고 다시 쓰러지듯 드러눕는 나날이다.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느라 잠이 늦다. 그래서 늘 '몸도 안 좋으면서 잠이라도 많이 좀 자지... 텔레비전은 무슨...' 자다 일어나 화장실에 가면서 약간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곤 했다.

어제는 아내도 밭에서 한나절을 지냈다. 고구마를 캐려고 고구마줄기 예초작업을 하는데 곁에서 부드러운 고구마순과 고구마줄기를 땄다. 묵나물을 해두기 위해서였다. 특히 아내는 묵나물 중에서도 부드러운 고구마순 묵나물을 좋아했다.

▲ 김석봉(녹색당 전 대표)

늦더위의 기승에 땀을 비오듯 쏟았다. 비닐멀칭을 걷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아 온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아내도 예초하기 전에 한줌이라도 더 따두려고 바쁜 손놀림을 이어갔다. 건너편 산등성이 떡갈나무잎에 색을 더하는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한 번씩 허리를 펴곤 한다.

상추쌈에 묵은지두부된장국으로 어두운 저녁을 차려 먹었다. 아내는 고구마순과 고구마줄기를 삶느라 내가 밥그릇을 다 비웠을 무렵에 들어왔다. '힘들것다. 낮에 너무 덥던데...' 나물 삶은 열기에 얼굴이 벌겋게 단 아내가 말했다. '니는 안 힘드나. 마찬가지제... 밥 많이 묵고...' 빈 밥그릇을 들고 일어나는데 '끄응'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느 날처럼 방에 들어와 자리에 눕고, 텔레비전 뉴스채널을 틀어 하루 세상을 살피고, 눈꺼풀이 동공을 덮어 내려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모로 돌려눕히고, 한 시간쯤 선잠에 들고, 잠에서 깨어 눈을 떠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 저기 텔레비전 앞에 앉은 아내가 혼자서 옆구리 쪽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은 허리를 펴고 일할 나이이건만 고구마밭에 주저앉아 앉은뱅이처럼 움직이며 고구마순과 고구마줄기를 따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쯔쯔가무시 예방약을 뿌리고 나왔다며 힘든 내색을 감추는 모습이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내게 한 열댓 박스 고구마 주문이 들어왔던데...' 새벽에 아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내게도 서른 박스 가까이 들어온 것 같더라...' '올해는 작년보다 주문이 주네... 다들 살기가 어려운가 봐...' '기본은 안 하것나. 걱정 마라...' '오늘 고구마 캐는 아지매들이 네 명이가?' '새참은 빵으로 하고, 점심밥은 찌개나 하나 끓이면 안 되것나...‘

창이 뿌옇게 밝아오고, 지금부터는 또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오늘은 일꾼이 네 명이나 되니까 당신은 집에 일이나 하고 나오지 말고...' 양말을 찾아 신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쯔쯔가무시 약 뿌리고 가소.' '새참 먹을 때쯤 아지매 한 사람 보낼 테니 그리 알아...‘

밭으로 가는 길엔 낙엽이 쌓였다. 이슬이 많이 차가워졌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보다 몸이 실하니 나를 믿으시게. 제발 밭엔 나오지 마시게. 당신이 가꾼 꽃밭 향기에 취하고, 손녀딸 재롱에 몸을 맡기시게.


김석봉  ksb@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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