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길었다. 드디어 기다린 날이 왔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간절히 빌어야 무엇이 있다면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으로 가볼 일이다. 나 역시 간절한 바람을 안고 음력 3월 3일(3월 30일) 명석면으로 떠났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으로 가는 길에는 광제서원과 광제산을 지나간다.

 

진주에서 산청으로 가는 국도 3호선에서 명석면사무소 이정표를 따라 들어갔다. 명석면 사무소 앞에 세워진 내 간절한 바람을 닮은 주인공이 먼저 반긴다. 우는 돌, 명석(鳴石)이라는 유래를 간직한 자웅석(雌雄石)을 닮은 돌이지만 지날 때 마음속으로 빌었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매년 음력 3월 3일 주민들이 제사를 올린다.

 

지금은 남양 홍씨 재실로 사용하는 광제서원이 나온다. 서원은 처음에는 홍복사(洪福祠)였으나 1747년 홍지암(洪池庵)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891년 중수하면서 모원재(慕遠齋)로 개칭하여 남양 홍씨 문중의 재실로 사용해왔다. 1976년 영남유림이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해마다 음력 3월 10일 고려 은청광록대부 상서 홍의(洪毅)와 고려 금자광록대부 수상공상서 보문각, 태학사 홍관(洪灌)에게 춘향(春享)을 올린다. 목조건물은 고려 초기의 건축 형태를 잘 보여 준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중 남자 성기를 닮은 돌 높이가 97cm, 둘레 214cm다.

 

광제서원으로 향하는 길도 그냥 지나쳤다. ‘토종 100% 국산 소나무 숲길’이라는 광제산 등산로를 알리는 선간판이 보인다. 2004년 무너진 돌무더기를 이용하여 원형대로 복원함으로써 전국에서도 원형이 살아있는 몇 안 되는 봉수대가 자리 잡은 광제산에 오르면 지리산과 삼천포 와룡산도 보인다. 봉수대가 있는 광제산 가는 길을 지나고서도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길 양편으로 차들이 한적한 도로 위에 세워져 있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중 족두리 닮은 돌은 높이 77cm, 둘레 147cm다.

 

경상남도민속자료 제12호인 운돌 한 쌍은 남자 성기와 여자 족두리를 닮은 자웅석(雌雄石)이다. 남자 성기를 닮은 돌 높이가 97cm, 둘레 214cm다. 족두리 닮은 돌은 높이 77cm, 둘레 147cm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빌던 선돌(立石)이었다. 지금은 비바람 등으로부터 선돌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앞에서 음력 3월 3일 오전 11시 정각에 열리는 제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뒤편으로 광제산이 보인다.

 

비각 앞 넓은 잔디밭에는 머리에 검은 망건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제관들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선돌 한 쌍 앞에는 돼지머리며 수박, 딸기 등 차려져 있다. 오전 11시가 다가오자 인근 중학교와 초등학생을 태운 학교버스가 도착하고 학생들이 내린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은 다산과 풍요를 빌던 선돌이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는 진주성의 밑돌이 되기를 희망한 돌이기도 하다.

 

정각 11시, 사회자가 명석각 자웅석 유래를 먼저 알렸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말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정비하였다. 광제암의 스님이 성 보수를 마치고 돌아가다 저만치에서 서둘러 걸어가는 돌을 만났단다. 사람도, 네발 달린 짐승도 아닌 돌을. 돌에게 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물었더니 진주성을 쌓는데 밑돌이 되기 위해 간다고 했단다. 스님은 이미 공사가 끝나 소용없다고 했더니 돌은 진주성의 밑돌이 되지 못한 게 서러운지 크게 울었다. 스님은 돌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아홉 번 큰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세월이 흘러 운돌은 명석면의 자랑이요, 지역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돌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사흘 동안 크게 울었다고 한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비각 아래에서 초헌관이 먼저 손을 씻고 알자를 따라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경건하게 올라왔다.

 

집례자가 “지금부터 정유년 삼월 삼일 자웅석 제례를 행할 것입니다. 헌관이하 제관은 차례로 서시오~”라는 말과 함께 제45회 명석각 제례의식이 시작되었다. 비각 아래에서 초헌관이 먼저 손을 씻고 알자를 따라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경건하게 올라왔다. 초헌관이 꿇어 앉자 집사들이 초를 켜고 향을 피우자 초헌례가 시작되었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제레에서 주민과 나라를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있다.

 

술을 따르고 두 번씩 절을 했다. 축문을 읽었다. 초헌례가 끝나자 아헌관이, 종헌관이 초헌관과 같은 방식으로 올라와 술을 올리고 절을 드렸다. 제례가 종헌관이 물러나자 모두는 애국지사 호산 김용식 선생의 비문으로 향해 묵념했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제례가 끝날 무렵 참가자 모두는 항일투사 김용익 선생의 비문을 향해 묵념을 올렸다. 자웅석 비각 앞에 선생의 비가 있다.(사진 왼쪽)

 

항일투사 김용익(金溶益, 18866~1970) 선생은 진주 3·1운동 때 종소리에 따라 주민들을 지휘하고 진주성 남문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후에도 광복단에 가입 군자금 모금활동 중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 진주 명석면 자웅석 제례의식이 끝나자 음식을 함께 먹었다. 밥 한 끼를 나누는 이곳은 순식간에 찰박한 정이 넘치는 잔칫집이 되었다.

 

모든 의식이 끝나자 모두는 주민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었다. 밥을 함께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만이 아니다. 미래의 꿈과 비전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밥 한 끼를 나누는 이곳은 순식간에 찰박한 정이 넘치는 잔칫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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