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도 때가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은 스물여덟에 고향 합천 삼가에서 아버지 삼년 상을 치른 뒤 경남 의령 자굴산 절에서 학문에 정진했다고 한다. 공부는 젊은 시절을 놓쳐버리면 기초를 쌓기 어렵다고 여겨 산으로 들어가 공부했다고 한다.

남명 조식의 발자취를 따라서

- 의령 자굴산과 명경대

▲ 남명 조식 선생은 스물여덟에 고향 합천 삼가에서 아버지 삼년 상을 치른 뒤 경남 의령 자굴산 절에서 학문에 정진했다고 한다.

 

햇살 좋은 3월 11일,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의령의 진산(鎭山)인 자굴산을 찾았다. 자굴산은 합천 쪽에서는 병풍처럼 보이지만 의령읍을 향해서는 산세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변한다.

 

▲ 의령군 내조리에서 올라가는 자굴산 등산로는 직진뿐이다.

 

칠곡면 소재지에서 산 쪽으로 들어가면 내조리 내조마을이 나온다. 공영주차장 못 미친 곳에서 ‘의령 큰 줄 당기기’에 사용할 큰 줄을 마을 사람들이 여럿이 달라붙어 엮고 있다. 주차장을 지나 자굴산 입구에 차를 세웠다. 정상까지 3.2km다. 목재로 된 길을 따라 1분 넘게 올라가자 본격적으로 흙길이 나온다.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든다.

 

▲ 직진뿐이었던 길은 이제 살짝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자굴산 정상이 설핏 보인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가파른 길을 오른 통에 벌써 땀이 주르륵 흐른다. 20여 분 가파른 길을 오르자 긴 의자가 나온다. 숨을 골랐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초록빛이 보이지 않는 사이로 분홍빛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다. 진달래꽃에 힘을 얻어 올랐다.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내조마을이 보인다. 길은 오르기만 있다. 등 뒤로 햇살이 들어오고 그림자가 나와 함께한다. 까마귀 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린다.

1.4km 걸어왔다고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왔다. 절터샘이 1.1km 남았다는 안내판에 힘을 내고 걸었다. 두 번째 쉼터에서 숨을 골랐다. 담배꽁초며 주전부리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직진뿐이었던 길은 이제 살짝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산 정상이 설핏 보인다. 돌무덤이 나온다. 저마다의 바람이 돌 하나하나에 담겨 탑을 이루었다. 흙길은 이제 완전히 연자줏빛이다. 내조마을에서 1.9km, 절터샘까지 0.6km. 숨소리는 거칠다. 길은 지그재그다.

▲ 자굴산 절터샘

 

돌무더기가 휩쓸고 지나간 산자락이 가파르다. 돌탑을 지났다. 절터샘이다. 가쁜 숨을 고르며 물 받아 마신다. 상쾌하다. 절터샘에서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자굴산 8부 능선을 중심으로 만든 둘레길도 있다.

 

오른쪽 금지샘으로 향했다. 까마귀가 “까악~까악” 소리치며 알은체를 하며 서쪽으로 날아간다. 다정한 부부가 서로 마주 보는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부부바위’다.

 

▲ 자굴산 부부바위

 

‘부부바위’는 아주 오랜 옛날, 자굴산 큰 바위 밑에 금실이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남편이 출전했다. 부인은 매일 자굴산 큰 바위에 올라 남편을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아내도 그리움에 사무쳐 죽었다. 이때 바위에 벼락이 치더니 부부의 형상을 한 바위가 생겼다. 이를 사람들이 ‘부부바위’라 부르는데 왼쪽이 갑옷 차림의 장수, 오른쪽이 아기를 업은 아낙이 출전 전 이별의 정한을 나누는 모습이라고 한다.

 

▲ 자굴산 금지샘

 

금지샘 쪽으로 향했다. 여성 성기를 닮은 금지샘은 어떤 가뭄과 폭우에도 솟구치는 물에 변화가 없다고 한다. 약 3m 깊이의 천연동물 샘으로 왼쪽은 사람이, 오른쪽은 짐승이 먹었다고 하는데 명주실 세 꾸리가 풀리는 깊이로 샘 입구에서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남강의 솥바위에서 솟아 나온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물이 말라버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 자굴산 금지샘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산 아래 마을 풍경

구름다리를 지나면서 저 아래 마을과 산능선이 펼쳐진다. 펼쳐진 풍경은 마치 시원한 동치미 국물처럼 마음을 확 풀어준다. 구름다리를 지나 솟은 바위로 향하는 길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길이다. 조심조심 올랐다.

 

▲ 자굴산 ‘명경대(明鏡臺)’로 추정하는 바위

 

‘명경대(明鏡臺)’로 추정하는 바위다. 선생이 머물렀던 절과 명경대는 정확하게 어디를 지칭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아찔한 바위를 60대 아저씨와 아주머니 일행이 오르면서도 오히려 “산타는 재미”가 있다며 좋아한다.

 

▲ 자굴산 명경대로 오르는 길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길이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 옮긴 <남명집>에 따르면 선생은 명경대를 보며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높은 명경대 누가 공중에 솟게 했는가? / 그 당시 오주(螯柱·하늘 기둥) 부러져 골짜기에 박힌 것이리./ 창공이 저대로 내려오는 것 허락지 않은 것은,/ 양곡(暘谷·해 뜨는 동쪽)을 다 볼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리,/ 속인이 이르는 것 싫어해 문 앞에 구름을 드리웠고,/ 마귀의 시기가 두려워 바위를 나무가 에워쌌도다./ 하늘에 빌어 주인 노릇 해볼까도 하지만,/ 은혜 융성한 걸 인간 세상에서 질투하니 어쩔 수 없네.”

 

▲ 자굴산 ‘명경대(明鏡臺)’로 추정하는 바위

 

선생이 하늘 받치는 기둥이 부러져 이 골짜기에 박혔다고 표현할 만큼 명경대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명경대 주인이 되고 싶을 만큼 좋아했던 까닭은 선생이 닮고자 했던 기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절간의 방을 빌려 혼자 기거하면서 문을 닫고 글을 읽었다. 옛날 사람들은 가락을 넣어 길게 소리를 뽑아 읽었다. 선생은 글을 읽을 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음으로 글 전체의 큰 뜻을 터득한 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번 앉으면 꼼짝 않고 새벽까지 그대로 앉아 공부했다고 한다. 절의 스님은 선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전했다고 한다.

 

▲ 자굴산 절터샘

 

“거처하는 방이 종일토록 조용합니다. 밤이 깊어 글을 읽으면서 때로 마음에 맞는 글귀를 만나면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립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직도 글을 읽고 있구나 하고 우리들은 짐작하지요.(<남명선생편년>)”

 

선생은 2년 가까이 자굴산에서 생활하며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다. 뜨거운 물과 끓는 물의 차이는 딱 1도다. 이쯤이면 됐다고 스스로 위안 삼는다면 물은 뜨거울 뿐 끓지는 못한다. 내 안의 열정을 일깨우는 시간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공부를 향한 마르지 않는 열정 덕분에 나 역시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을 배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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