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500리] 상남리 골짝 사람들 "남강을 와 요서 찾노?"

권영란 기자l승인2017.02.13l수정2017.02.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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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500리] (2)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구평교

한국의 강들이 그러했고, 경남의 남강이 그러하였다. 산정으로부터 내려온 물은 골짜기를 내고, 골짜기는 다시 물을 아래로 밀어 내렸다. 물은 뭇 생명들과 서로 의지하며 때로는 고였다가 썩었다가, 다시 걸러지기를 거듭했다. 골짝 골짝 물들이 모여 길을 내었고, 물길은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었다. 강은 어미의 몸에서 나온 탯줄처럼 세상 밖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나와 뭇 생명을 키우고 거둬들이고 다시 탄생케 했다.

 

▲ 서상저수지수변공원. 북쪽으로 비 그친 뒤 흰 구름에 싸인 남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권영란 

 

아차! "남강을 아십니까?"로 시작해야 했다.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발원지인 남덕유산 아랫마을 이곳 사람들은 정작 남강을 잘 알지 못했다. 더러는 '진주 남강을 와 여기 와서 찾아샀노'라고 말하고 더러는 아예 '남강이 머꼬?'라는 표정이다. 마을 앞에 흐르는 골짝물이 남강으로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바다까지 간다는 것을 굳이 생각지 않았다.

덕유교육원 골짝물과 장구지, 신기 본동에서 내려온 개울물은 폐교가 된 상남초등학교 앞 영신교 아래에서 비로소 한 물길을 이뤘다. 가늘게 이어지다가 여울목에서는 유속을 빨리 하며 상남리 조산, 신기, 식송, 동대 네 개의 마을을 차례로 지났다.

이곳 골짜기 맨 끝자락에 있는 조산마을은 조선 세종 4년 무신란 때 황산에 살던 창녕 조씨가 난에 연루된 인척으로 인한 화를 면하기 위해 들어와 일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삼, 백작약, 두릅…. 산이 다 돈이었제. 온 산에 나물 뜯으러 다니고. 먹고 살아야허니 3년마다 불 질렀제. 불을 못내게하니 인자 글치. 우리 젊을 때사 된장 하나만 들고 가서 나물 뜯어 싸먹고 똥 싸도 집에 가져왔다. 거름한다꼬."

약초나 나물을 캐러 다니고 숯을 굽기 위해 오르던 길은 이제 등산로로 정비돼 있지만 여러 개의 숯가마터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조산마을 앞 들판에는 무논의 모들이며 밭이랑에 심긴 배추 깨 옥수수 등 아직 어린 것들이 땅 속에다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 남덕유산에서 내려온 물길이 식송마을 개울을 이루고 마침 아이들이 족대로 고기를 잡고 있다./권영란 기자

 

◇마을에서는 족대로, 어항으로 고기잡이 하고

마을버스 한 대가 식송마을 어귀에서 서더니 아이들 셋이 내렸다. 그러고는 바로 앞에 있는 식송교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다. 아이들 손에는 족대가 들려있다.

"셋 다 처음 해보는 거라 잘 못해요. 아버지한테 얘기 듣고 재미있겠다 싶어 면(소재지)에 가서 족대 사 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식송마을에 사는 서현민(서상중 3)이가 자기 마을 앞 개울에 물고기가 많다며 서상범(서상중 2·칠형정마을), 전병욱(서상중 3·서하면)을 꼬드겼다고 했다. 아이들은 물이 아직 차갑다며 서로 들어가기를 미뤘고, 족대로 어떻게 잡는지를 몰라 얼마동안은 우왕좌왕하더니 금세 개울을 뛰어다닌다.

아이들 고기 잡는 소리에 놀라 다리 위로 뛰어온 노인은 식송마을 최성용(74) 아재다. 두어 군데 어항을 놓았는데 아이들 때문에 고기들이 다 도망가겠다고 한 마디 하면서 족대 쥐고 물고기를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 세세히 가르쳐준다.

"사변 전에는 다 이 물을 먹었지예. 꺽지, 모래무지 괴기들도 엄청 많아갖꼬 점심 먹고 바위 밑을 손으로 한 번 더듬기만 하면 큰 고기가 수두룩인 기라. 손으로 잡아도 혼자 다 못 먹었제. 근데 밑에 저수지 만들고부터는 맨날 작은 고기뿐인 걸 우째. 저수지 둑 높인다꼬 물 빼고나니 괴기가 멸종이 된기라. 그래가꼬 방생하더만 그기 또 우리 토종이 아이고 오데 말도 안되는 서양 괴기인 기라."

최 씨 아재가 들어 올린 어항에는 손가락만한 서너 마리가 파닥거렸다. 한나절 잡아서 매운탕 끓여 마을 사람 두엇 어울려 약주 한 잔 하는 재미라 했다. 최 씨 아재는 "요새는 퍼뜩, 마이 잡는다꼬 약 풀어서 잡더라"며 "내는 그래도 이리 떡밥 써서 잡는다"고 말했다.

 

▲ 최성용(75. 상남리 식송마을) 아재는 어항으로 고기를 잡는 게 소일거리였다./권영란 

 

동대3교를 지나기 전 제법 강폭이 넓어지는가 싶더니 물길은 금세 서상저수지에 닿았다. "배스가 제일 많이 잡히고 붕어도 잡히고…. 잡는 재미지예."

서상저수지는 2013년 초 '둑 높이기 사업'을 완료했다. 농어촌공사 거창·함양지사에 따르면 홍수 및 가뭄 피해를 예방하고 저수량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2010년부터 시작해 3년 동안 진행한 공사로, 둑을 4.3m 높게 하여(EL 520.7m→ 525.0m) 현재 저수지 규모인 137만 톤의 3배 정도인 439만 톤의 저수량을 확보하게 됐다. 현재 저수지 수변공원도 조성되어 있지만 사람이 드나드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수지 둑에 서서 뒤돌아보니 멀리 구름을 이고 있는 남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남강 상류인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에는 논개묘로 알려진 곳이 있다./권영란

 

◇남강 물길을 지척에 두고 논개묘가 있다

상남리에서 내려온 물길은 중남 삼거리에서 중남교를 지나 26번 도로를 따라 휘돌아간다. 그러다가 다시 서상면 소재지 직전 수개마을 앞 서상교를 지난다. 서상교 한쪽에는 '지방하천 남강' 파란색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물길은 살목재 아래서 오산교까지 흘러온 대남천과 합류해 방지교에서 비로소 '국가하천 남강'을 이뤄 흘러간다.

'남강 오백리'를 따라가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이곳 서상면에 있는 '논개묘'다. 면소재지에 있는 방지교에서 논개로를 따라 2km를 갔을까. 전북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는 방지마을, 주민들이 '탑시기골'이라 부르는 곳에 논개묘가 있다.

논개(1574~1593)는 역사적으로 남강과 필연적으로 묶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 씨 성으로 전북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이 고향이고, 임진란이 발발한 지 1년 후인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된 후 성 아래 바위(의암)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논개는 임진란 이후 신분을 이유로 '의로운 죽음'을 인정받지 못했다. 진주지역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유몽인의 <어우야담>(1621)에 처음으로 수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애달픈 넋을 위로하기 위해 영조 16년(1739)부터 남강가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를 지냈다 한다. 일제강점기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도 진주성에는 논개 영정을 모신 의기사가 있고 해마다 5월이면 논개와 7만 민·관·군을 추모하는 제를 지낸다.

묘역은 평일 늦은 오후의 그림자와 함께 적요하기만 했다. 영정을 모신 사당 옆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니 높이 세운 봉분과 비석이 남쪽을 향해 있다. 묘 위쪽으로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최경회 장군의 묘가 있고, 주변에는 시신을 옮겨온 의병들을 추모하는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가 있다. 논개는 남강에서 죽음을 맞았고, 죽어서도 이렇게 남강 상류에 묻혀 있었다. 지척에 있는 강물을 따라 논개의 넋도 흘러흘러 진주성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 듯하다.

이곳 묘역에서 장수군 생가까지는 채 20km가 안 된다. 그런데도 고향이 아니라 이곳 탑시기골에 묻히게 됐을까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거론되지만 '전 논개 묘역(傳 論介 墓域)'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진주에서 시신을 거둬 요기까지 오는 데만 여러 날이라. 오는 동안에 시신이 말도 못하게 부패했는데 또 육십령을 넘어야 했던 기라예. 육십령이 와 육십령인고허니, 도적떼가 하도 많아서 60명 이상이 돼야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던 기라요. 우짜기고? 고마 고향에서도 멀지도 않으니까 허는 수 없이 요기에다 안장했다데."

 

▲ 서상저수지수변공원. 북쪽으로 비 그친 뒤 흰 구름에 싸인 남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권영란 기자

 

◇구평들녘 수많은 시름을 담아 서하로 흘러가고

서상면 소재지에서 논개묘역으로 들어서는 방지교를 지나온 물길은 이내 거망산 아래 피적래길을 따라 내려온 도천천을 만난다. 들판 양파밭에는 머릿수건을 두른 열댓 명의 아지매들이 줄을 지어 한창 막바지 수확으로 분주했다. 양파는 창녕이 주산지로 알려져 있지만 남강을 끼고 있는 함양, 의령 지역 또한 주산지이다.

"수확을 하모 머하노? 양파값이 똥값이라는데. 갈아삐지도 못하니까 수확은 하는데 금이 택도 안된다아이가. 우리사 일삯 받으모는 되지만 밭 주인이 별로 신이 안나더라."

인근 마을에서 품일 하러 온 아지매들은 "우짜노"라며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

지난 19일에는 20㎏들이 양파 1000여 망이 경남도청 정문 앞에 쌓였다. 양파·마늘 가격폭락으로 속수무책으로 밭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던 농민들이 정부·농협 등에 대책마련을 촉구하며 야적시위를 벌인 것이다.

서상면 소재지 앞 구평들녘은 농민들의 시름인 양 붉은 양파무더기들이 뒹굴고, 하지를 앞둔 강변 물버들은 짙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물길은 논개의 짧은 생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듯 구평교 어귀에서 강폭을 점차 넓혀 남쪽으로, 서하로 굽어 흘러갔다.


권영란 기자  kyr65@dand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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