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끔했다. 월간 형태로 발행하는 진주지역 청소년문화공동체<필통>(http://www.ifeeltong.org/)에서 펴내는 신문에서 ‘우리 학교 안에 문화재가 있었어?’ 기사는 마치 진주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죽비를 내리치듯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몇 해 전의 기억을 더듬어 12월 4일, 신문 기사를 복기하듯 길을 나섰다.

 

▲ 대아고등학교 정문 옆으로 세워진 비는 ‘민성, 민족, 민본, 민생, 민복’의 오민사상을 기반으로 바른 양심, 강한 국방, 화합국민, 알찬 살림, 즐거운 생활이라는 실천을 담은 ‘완전사회창조를 위한 전인교육- 오민교육구조도’라는 건학정신을 담고 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진주시 이현동 숙호산 자락에 있는 대아고등학교. 정문을 들어서자 한쪽에는 일요일 아침부터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공 따라 물결처럼 일렁인다. 학교 건물에는 행정고시 합격과 장군 진급, 장관 발탁, 수능입시 합격 응원 문구가 어지러이 펄렁인다. 교문 왼편 호랑가시나무가 심어진 옆으로 ‘진학 공적 기념비’가 서있다. 1984년에 서울대학교에 66명이나 입학한 후배들의 공적(?)을 기리는 총동창회에서 세운 비다. 비 뒤로는 ‘민성, 민족, 민본, 민생, 민복’의 오민사상을 기반으로 바른 양심, 강한 국방, 화합국민, 알찬 살림, 즐거운 생활이라는 실천을 담은 ‘완전사회창조를 위한 전인교육- 오민교육구조도’라는 건학정신을 새긴 비가 몇 걸음 뒤에 서 있다.

 

▲ 대아고등학교 교실 건물 쪽 화단에 <이현동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안내판에는 ‘신라 시대 말이나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으로, 탑의 높이는 2.1m이다.~’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0호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공적비 뒤편 옆으로 문무석이 양옆으로 서 있는 가운데에 모현단이 널따란 바위 위에 올려져 있다. 모현단에는 항일학생운동 단체인 '반진단(般震團)'에서 아시아의 자립과 민주 독립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을 발의해 현재의 대아고를 설립, 숙호산으로 옮긴 내력을 적은 아인 박종한 선생 글이 새겨져 있다.

 

모현단을 나와 <오민대> 뒤로 걸었다. 오민대 뒤편으로 학교 교실 건물 쪽 화단에 <이현동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안내판에는 ‘신라 시대 말이나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으로, 탑의 높이는 2.1m이다.~’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0호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안내판 뒤로 화단 속에 석탑으로 가는 길은 자연석으로 계단을 이루고 있다. 반송을 지나자 석탑에 이른다. 석탑은 석등과 문인석을 앞세우고 자리 잡고 있는데 주위는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져 있다.

 

▲ 대아고등학교 내에 있는 <이현동 삼층석탑>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며 찬찬히 석탑을 돌았다. 탑 옆에 있는 꽃과 잎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세상을 준비하며 온 힘을 다한 매실나무는 겨울눈을 품고 있다. 매실나무의 겨울눈과 석탑의 기운께 조용히 내 소원을 빌었다.

대아고를 나와 이동한 곳은 상봉동 비봉산 자락 아래에 있는 진주여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입구 한쪽에 <경상남도종묘장 터>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경남도농업기술원의 전신인 경상남도종묘장은 대한제국 1908년 3월 종묘장 관제를 공포함으로써 설치되었다고 한다. 1923년 당시 행정구역인 진주읍 천전리(지금의 칠암동)로 이전된 뒤 1945년 3월 29일 진주여고의 전신인 진주공립고등여학교가 이전에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 진주여고 교정

 

대학교정을 들어서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진주여고를 들어서자 오른편에 ‘3·1 독립 선언이 있은 후 교육이 조국 광복의 첩경임을 간파한 지방 유지 허만정 씨 외 십여 인이 성금을 모아 일신 재단을 구성하고 본교를 설립했다’는 <일신> 탑이 서 있다. 왼편에는 학교 안내도가 세워져 있지만 문화재 위치는 없다.

 

▲ 진주여고 효주기념관 앞에 있는 석불좌상

본관 앞에는 일신상(一新像)이 세워져 있다. 개교 70주년을 기념한 일신상(一新像)이 서 있다. 책과 횃불을 든 두 여인 사이로 한복을 입은 여인이 두 손으로 공손히 나뭇가지를 받쳐 하늘을 향하는 조각상이다. 일신상을 구경하다 교문에서 한길로 쭉 뻗은 ‘충효로’를 건너 <효주기념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해로 개교 91년을 맞은 진주여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효주(曉州) 허만정(許萬正) 선생의 뜻을 기리어 그 아들인 완구씨가 이 집을 세웠다는 기념석이 기념관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기념관 앞에는 잔디밭이 동그러니 있고 주위를 둘러싼 대나무가 오가는 차들과 사람의 경계를 이룬다.

 

▲ 진주여고 효주기념관 앞 수돗가 옆으로 한쪽 구석에 석불좌상을 비롯한 돌덩이 네 개가 나란히 우두커니 있다.

아쉽게도 내가 찾는 문화재는 기념관 앞 수돗가 옆으로 한쪽 구석에 돌덩이 네 개가 나란히 우두커니 있다. 그중 하나가 지역 시민이 기부했다는 석불좌상이다. 석불좌상은 목도 다리도 없다. 석불좌상 옆에 직사각형 돌에 부처님이 돋을 새겨져 있다.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굽혀 부처님을 뵙고 절 올린다. 돋을새김 부처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마음속으로 염원한다.

 

▲ 삼현여고 곽낙원 여사상.

 

진주여고를 나와 진주시청 맞은편 상평동에 자리한 삼현여고를 찾았다. 교문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교정을 바라보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조각상이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상(像)이다. ‘아들이 일제하 인천 감옥에 갇혔을 때 “네가 여기 있는 것이 한성판윤을 지내느니 보다도 낫다.”고 격려하며 밥을 빌어 옥바라지할 때’ 모습을 재현했다. 교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몇 걸음을 옮기면 <상평동 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정문에서 교정으로 가는 길 화단에 빛바랜 안내판 옆에 1.65m의 불상이 자리 잡고 있다.

 

▲ 삼현여고 내에 있는 <상평동 석조여래좌상>

 

머리가 다른 신체에 비해 엄청 큰 불상은 왼쪽 머리가 손상을 입었고 양 손목에는 손을 따로 만들어 끼울 수 있는 둥근 홈이 있다. 멀리서 얼핏 보면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외계인의 모습이다. ‘고려 시대 충청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돌덩어리에 간단하게 얕은 돋을새김이나 선 새김으로 신체 표현을 한 단순하게 제작된 불상과 비슷하다. 경남지역에서는 마애불을 제외하고는 이 불상 이외에는 사례를 알 수 없다(<불상에 새겨진 경남의 얼굴>)’고 한다.

 

비록 지금은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불상을 만들어 염원했던 그 당시 사람들의 바람이 돋을새김을 통해 전해진다.

 

▲ 삼현여고 교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몇 걸음을 옮기면 <상평동 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정문에서 교정으로 가는 길 화단에 빛바랜 안내판 옆에 1.65m의 불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밖에도 동명고등학교에 <영장심공낙신영세불망비>와 <석조귀부, 이수>가 있다고 한다. 문화재는 비단 국보, 보물만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학교 내에 있는 문화재도 제대로 알리고 일깨웠으면 한다. 알면 고물도 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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