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농민항쟁에 앞서 농민항쟁의 산청 단성

쉬는 날에도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 출근하며 얼핏 설핏 봤던 그 길을 찬찬히 둘러볼 참으로 아침 먹자 운전대를 잡았다. 시원하게 뚫린 4차선 일반국도 3호선에서 벗어나 옛 진주-산청 구간을 지나가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진주와 산청의 경계를 이루는 진주 명석면에서 다리를 지나 에둘러 신안면 원지마을로 들어가 적벽산을 감아도는 길은 호수처럼 맑은 경호강이 함께하고 바위 벼랑이 운치를 더한다.

 

▲ 산청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단성교를 건너면 지리산 품에 안긴다. 신선 세계에 접어드는 첫걸음이다.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단성교를 건너면 지리산 품에 안긴다. 신선 세계에 접어드는 첫걸음이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탁영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단성을 일컬어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이나 낮이나 항상 밝다고 하는 단구성(丹丘城)이라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11월 25일, 나 역시 신선 사는 곳을 들어섰다.

단성은 가야 시대에는 궐지국으로 불리다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결성군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에 강성현, 강성군으로 불리다가 진주목의 속군이 되었다. 조선 초기 진성현이 되었다가 다시 강성현이 되었고 세종 14년(1432년) 단계현을 합쳐 단성현으로 탄생한 이래 현청이 자리한 곳이다. 1914년 산음현과 합쳐진 산청군의 단성면으로 편입, 현재에 이른다.

 

▲ 가을걷이 끝난 들 옆으로 적벽산을 안으며 흙담을 따라 들어가면 읍청정이 나온다.

 

세종대왕이 화낸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놀게 만드는 경치

단성교를 지나 단성중고등학교 옆으로 빠져나와 강에 누각이 있다는 강루리(江樓里) 마을회관에 차를 세웠다. 한때는 경형, 담분, 유취, 매연 등의 6개의 정자가 있었다는 마을이지만 지금은 1919년에 지은 읍청정(揖淸亭) 하나만 남아 있다.

가을걷이 끝난 들 옆으로 적벽산을 안으며 흙담을 따라 들어가면 읍청정이 나온다. 읍청정은 안동 권씨 33세손인 권두희가 풍류를 즐기고 학자들과 사귀기 위해 만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솟을대문에는 이락문(二樂門)이라고 현판이 걸려 있다. 두 가지 즐거움이란 무얼지 궁금했다. 관리하는 분이 출타했는지 사방에 있는 문들은 다 굳게 닫혀있다. 까치발을 하고 건물을 보았다. 마당 한편에 있는 하얀 소나무(白松) 먼저 나를 반긴다. 백송에게 눈길 한번 주고 본 건물인 읍청정을 바라보자 무려 현판이 3개나 걸렸다. 읍청정, 관수헌, 장서루. 옛 건물들은 사라지고 시를 읊고 즐긴다는 읍청만 남은 모양이다.

▲ 강에 누각이 있다는 산청 강루리(江樓里)는 한때는 경형, 담분, 유취, 매연 등의 6개의 정자가 있었다는 마을이지만 지금은 1919년에 지은 읍청정(揖淸亭) 하나만 남아 있다.

 

흙담을 따라 돌며 건물을 구경하고 경호강으로 향했다. 경호강에서 바라보는 읍청정은 뒤로 백마산을 병풍 삼고 옆으로 경호강과 적벽산을 이웃하고 있다. 중절모를 닮은 백마산에는 산성이 있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진주성과 인접한 이곳에 여러 차례 싸움이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 침공한 일본군은 성안에 물이 부족하면 항복할 것이라 믿고 성을 포위했다. 이때 지혜로운 장수가 말 한 필을 바위 끝에 세우고 쌀을 퍼서 말 등에 뿌리자 멀리서 보기에 말 목욕 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왜적은 험준한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며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고 한다. 이때 성안의 사람들과 말이 일시에 경호강에 내달려 물을 마시자 세 치나 물이 줄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때부터 이 산성은 백마산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 백마산성이 있었던 산청 백마산.

 

읍청정을 이웃한 경호강 둔치는 봄이면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들인다.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강물이 흘러가는 물소리는 맑고 곱다. 경호강이 빚은 적벽산 바위벼랑들이 멋있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처럼 적벽부 뱃놀이를 모방해 강에 배를 띄우고 적벽산의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얼마나 놀기 좋은 곳이면 한때 이곳이 강성군이던 시절 태수가 밤에 배를 띄워 기생을 끼고 놀면서 적벽산에서 떨어진 돌에 배가 뒤집히고 인장을 잃어버려 파직된 적도 있단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단성고을을 지나는 사람은 이곳에 머물러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기만 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강루라는 정자 하나만 남기고 없애버리고 강성군을 현으로 강등시켜 지금의 소재지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이 지역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 경남 산청 단성의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단성고을을 지나는 사람은 이곳에 머물러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기만 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강루라는 정자 하나만 남기고 없애버리고 강성군을 현으로 강등시켜 지금의 소재지로 옮겼다는 전설이 있다.

 

1936년 홍수 때 신안루와 강가 숲도 떠내려갔다. 강둑을 높이고 강변 유역을 넓히며 강가에 있던 읍청정마저 마을 쪽으로 옮겨 옛 풍광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맑은 경호강이 흐르고 뒤에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들 건너에는 작은 산들이 옹기종기 솟은 경치에 쉬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한다.

 

들꽃처럼 떨쳐 일어난 단성 민중들의 함성이 몰려오는 곳

 

▲ 소쿠리 모양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산청 교동마을은 마음먹지 않으면 길가에서 떨어져 있어 찾기 어렵다.

 

다시 단성중·고등학교쪽으로 돌아나와 담장을 따라 1km가량 더 들어가면 소쿠리 모양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을 만난다. 교동마을이다. 마음먹지 않으면 길가에서 떨어져 있어 찾기 어려운 단성향교가 있는 교동마을에는 고풍스러운 한옥들이 여럿 있다. 마을 이름을 새긴 비석 앞에서부터 동네는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를 만난다. 소나무 아래 기선정(耆仙亭)이 있다. 정자를 지나 흙담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잉태한 목련의 겨울눈을 만난다. 시린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싹을 틔울 준비를 하며 치열한 준비하는 녀석이 존경스럽다.

 

▲ 산청 단성향교 주차장에는 한글과 영어로 적혀있는 오늘날 주차장 표지판 옆으로 하마비와 한자로 쓰인 향교주차장비가 나란히 서 있다. 현재와 과거가 함께하는 기분이다.

 

목련을 지나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향교 주차장이다. 한글과 영어로 적혀있는 오늘날 주차장 표지판 옆으로 하마비와 한자로 쓰인 향교주차장비가 나란히 서 있다. 현재와 과거가 함께하는 기분이다. 주차장을 지나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기와 처마 밑으로 황금빛 꽂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쫀득쫀득 익어가는 풍경들을 접한다.

 

▲ 산청 지역특산품인 지리산 곶감이 마을 곳곳에 꾸득꾸득 익어간다.

 

곶감이 익는 풍경 사이로 붉은 홍살문이 나온다. 단성향교다.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면서 지역 사회의 인재를 양성한 지방 교육기관이다. 문이 굳게 잠겨 향교와 담을 맞대고 있는 태극기 내걸린 집을 찾았다. 향교를 관리하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향교 안으로 들어가자 가슴이 뛴다. 명륜당이 독특하게 2층 누각으로 구성되어서도 아니다. 특이하게 명륜당 좌우에 있는 동재와 서재가 뒤쪽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1862년 임술년에 일어난 진주농민항쟁에 앞서 이 단성향교에서 먼저 농민항쟁의 횃불이 타올랐다. 단성 유생과 농민들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삼정문란을 혁파하기 위해 항쟁을 했다.

 

▲ 진주농민항쟁에 앞서 농민항쟁의 횃불이 타오른 산청 단성 향교.

 

돌베개출판사에서 펴낸 <답사 여행의 길잡이> 6권 ‘농민항쟁과 단성향교’편에 따르면 “철종 4년(1855) 경상감사를 지낸 신석우도 “단성의 환곡 폐단이 팔도에서 가장 심하다”고까지 하였다. ~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1년 겨울에는 수탈이 극심하였다. 단성 농민들의 계속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벼슬아치들은 그 호소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더 착취만 일삼았다.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은 이듬해 2월, 마을 사람들끼리 의논하여 날을 잡아 관청을 습격하였다. ~농민항쟁에 있어 조직적 구심점이 된 것은 향회였다.~양반 토호와 요호부민은 농민군과 함께 향회를 열어 항쟁에 대한 모든 것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단성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진주로 비화하고 이어 삼남 지방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철종 13년(1862년)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시작인 셈이다.

 

진주농민항쟁에 앞서 농민항쟁의 횃불이 타오른 산청 단성 농민항쟁

명륜당 뒤편 동재 옆으로 난 마당 한쪽에는 곶감에 꾸덕꾸덕 햇살에 익어가고 있었다. 익어가는 곶감들 앞에는 건물 한 채가 있다. 단성현 호적장부를 보관했던 향안실(鄕案室)이다. 오늘날 주민등록원본에 해당하는 호적대장은 조선 시대 호구 파악을 위해 지방행정단위별로 3년에 한 번씩 작성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단성현호적장적’은 조선 숙종 4년(1678)부터 정조 13년(1789)까지 약 100년간 산청군 관하 단성·신안·생비량·신등 4개면을 담당했던 단성현 주민들의 호구 기록부다.

 

▲ 조선 숙종 4년(1678)부터 정조 13년(1789)까지 약 100년간 산청군 관하 단성·신안·생비량·신등 4개면을 담당했던 단성현 주민들의 호구 기록부를 보관했던 산청 단성향교 향안실

 

단성현 호적대장 13책은 단성향교에 소장되어 있지만 1825~1888년의 대장 25책은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 때 침탈되어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1678년부터 1789년까지 13책만 필사본만 있다. 현재는 위탁받은 경상대학교에서 보관 중이다. 특정 지역의 대장이 일정 기간에 전체의 모습을 빠짐없이 갖춘 것이 드물다. 조선 시대 향촌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산청 단성향교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느릿느릿 걷는 걸음 따라 125년 전 들꽃처럼 떨쳐 일어난 민중들의 함성이 몰려온다.

 

단성향교를 나와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세월의 먼지가 쌓였다. 바람이 휘익 불자 세월의 먼지도 후두두 떨어진다. 느릿느릿 걷는 걸음 따라 125년 전 들꽃처럼 떨쳐 일어난 민중들의 함성이 몰려온다. 항쟁의 기운이 또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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