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마이클 무어 감독 같은 뛰어난 다큐 영화 감독이 나올 수 있을까? 그 물음의 답은 항상 같았다. '아마 안 될거야 우리는.'

영화감독이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마이클 무어 같은 방대한 자료와 소스를 갖추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간간이 국내산 다큐 영화가 나오지만 언제나 기대치를 밑돌았다. 한 마디로 단조로웠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뉴스타파' 최승호 감독이 만든

다큐 영화 <자백>…완성도 높고 볼거리 많아

 

영화 <자백> 시사회가 창원에서 열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봤자 뻔하겠지. 유우성과 관련인 인터뷰를 하고 법정 주변에서 사람 쫓아다니고 자료 사진 몇 개 보여주고 그게 다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은 이미 기사를 통해 전후 관계를 다 알고 있다. '그저 졸지만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극장으로 들어섰다.

처음엔 살짝 불안했다. 그가 연출했던 <PD수첩>이나 MBC <인간극장> 같은 식으로 흐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러 사건이 터지면서 영화는 얽힌 스토리를 풀어나가면서 흥미진진하게 관객을 이끌기 시작했다. MBC 피디로, <뉴스타파> 대표로 최승호 감독이 수년 간 쌓아온 방대한 취재자료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특히 '국내산' 다큐가 저지르기 쉬운 '한 말 또 하기', '느린 전개'를 깔끔하게 돌파하면서 씩씩하게 나갔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원세훈 전 국정원장·김기춘 청와대 전 비서실장들이 열연을 펼친다. 이들 덕분에 영화는 훈훈하다. 영화가 끝난 이후 "실제 장르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냐", "영화가 잘 되면 이들에게 출연비를 줘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가 근엄하게만 봐왔던 그들의 밑바닥이 드러난 순간을 관객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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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백> 스틸 컷./엣나인

 

영화는 관객들을 답답하게 하고, 화나게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역시 핵심은 북한 보위부에 의해 부모를 잃고, 북한 정권을 개새끼들이라고 하며 남으로 온 유우성이 어쩌다 간첩이 됐는지 얼마나 그게 황당한 근거인지 차곡차곡 보여준다.

그러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났다. 간첩 혐의 조사 중 죽은 한 탈북자. 국정원은 탈북자의 시신을 무연고 무덤에 묻어버리고 그의 죽음을 은폐한다.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어린 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하는 최승호 감독. 최 감독의 더듬는 말투에서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덕혜옹주> 같은 억지 시나리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더 슬프고 잔인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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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감독은 죽은 탈북자의 딸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죽음을 알린다./엣나인

 

그런데 아무리 잘 만들어도 영화가 어렵거나, 시사에 관심이 많은 특정 성향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꽝이다. 

<자백>은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일반 영화보다 쉽게 구성돼 있다. 뭔가 전제를 깔거나 미리 알아두어야 할 내용이 하나도 없다. 설교나 훈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간첩이라고 할 때에는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럼 근거가 타당한가. 단지 그 뿐이다.

중학생도 충분히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영화다. 말 그대로 '애들도 웃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영화 <자백>은 한국 다큐 영화가 가진 한계를 차례대로 무너뜨리고 관객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기뻤다. '드디어 한국에도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무서웠다. 그들의 타깃이 되면 나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일반 영화는 보고 나면 즉시 그 무서움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끝난 후 더 깊은 무서움으로 다가온다. 영화관에 있을 때는 그들과 떨어져 있지만 현실로 나오는 순간 그들과 한 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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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성씨의 동생 유가려씨는 국정원에 의해 고문을 당했고 이를 영화에서 증언한다./엣나인

 

따라서 이 영화는 이 세상 그 어떤 영화보다 뒷맛이 강하다. 뒷골이 서늘하다.

영화는 갈수록 그들의 실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결국 영화 말미에 관객의 고민이 시작된다. 저들과 맞서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고민을 안고 일어서려는 찰나, 긴 자막이 올라간다. 하나는 그동안 있었던 숱한 간첩 조작 사건 목록이고, 이어 영화 <자백>을 후원한 수만 명의 후원자 명단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출연자인 후원자 명단이 다 올라가는데만 9분이 넘게 걸렸다. '명단'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다 썩어 자빠진 것 같아도 아직 사람이 있다. 절망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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