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다가선 가을이 낯설다.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이 그렇게 물러날 줄 몰랐다. ‘훅~’하고 여유롭고 풍요로운 가을도 빨리 지나갈까 아쉬워 숲을 찾았다. 가을에 걷기 좋은 길, 일상의 찌든 때를 잊고자 길 떠났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안내도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마음이 이랬을까. 집 나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티셔츠 포켓 주머니에 꽂힌 볼펜을 확인하듯 만졌다. 10월 15일 함양에서 열리는 <제2회 선비문화축제> 과거 재현과 농월정에서 거연정까지 걷는 걷기대회에 참가하는 나는 벌써 선비가 되었다.

▲ 함양 농월정

 

걷는 선비문화 탐방로는 과거를 보러 무수히 많은 선비가 오간 길이다. 또한 화림동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해 세운 많은 정자가 함께 한다. 과거 보러 가는 양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진주에서 함양 안의면 농월정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산책로 오른편에서 들리는 화림동 계곡 물소리에 한 걸음, 숲 속 새소리에 두 걸음, 즐겁게 느릿느릿,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농월정에 도착하자 “쏴아악~” 참았던 오줌을 시원하게 눈것처럼 시원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2003년 방화로 사라진 농월정이 최근 복원되어 화림계곡의 맑은 물소리에 함께하고 있다. 자연이 그려낸 가을 그림이 눈을 맑게 한다. 소슬하게 부는 가을바람이 머릿곁을 스치며 귓가에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상쾌한 가을 공기에 가슴 속까지 시원하다. 들숨 길게 들이마시고 날숨 천천히 내 뺏는다.

 

대회 인사말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설렌 마음은 내딛는 걸음도 가볍게 한다. 아직 숲은 울긋불긋 단풍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발아래에서 이고들빼기가 노랗게, 개쑥부쟁이는 연분홍빛으로 반긴다. 산책로 오른편에서 들리는 화림동 계곡 물소리에 한 걸음, 숲 속 새소리에 두 걸음, 즐겁게 느릿느릿,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함양 람천정

 

안의면과 서하면 경계에 이르면 산책로가 아니라 아쉽게도 옛 도로길이 나온다. 출발한 농월정에서 1km가량 걸으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이들을 모신 황암사가 오른쪽에 나온다. 황암사 근처를 지나 람천정으로 향했다. 여름의 열기를 온전히 견디어낸 배롱나무꽃이 진분홍빛으로 가을바람에 살랑거린다. 고추밭에 고추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내 마음도 덩달아 익어간다.

 

▲ 숲에 감도는 신선한 바람은 산책로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더불어 맑고 경쾌하다.

 

학교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나무 ‘주목’을 키우는 농장을 지나자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 벼들이 아예 황금빛으로 드러누웠다. 먼발치 산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걸어온 지 1.6km쯤에 징검다리가 나온다. 건너면 람천정이다. 숲으로 들어가 흙길을 자분자분 밟으며 걸었다. 숲에 감도는 신선한 바람은 산책로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더불어 맑고 경쾌하다. 0.4km쯤 가면 경모정이 나온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를 걷으면 어느 순간 자연과 하나된다.

 

곳곳에 놓인 긴 의자 덕분에 굳이 정자에 오르지 않아도 쉬어가기 좋다. 흐르는 땀은 스쳐지나는 바람이 닦아주고 가져간 캔커피는 풍경에 더욱 달곤하다. 경모정을 지나자 오직 산책로 앞만 보고 걷던 사람들은 여기저기 쉴만한 곳에서 가져온 주전부리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곳곳에는 ‘농작물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판이 탐방객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경모정 주위에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호성 마을을 지나가면서 ‘농작물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판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농작물은 농민들의 땀과 정성으로 기른 소중한 결실입니다. 농민들의 자식과 다름없는 농작물에 절대 손대지 마십시오’라는 당부가 적힌 가로막이 곳곳에 놓여 있다. 사과 과수원 등에는 아예 CC-TV까지 설치되어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

▲ 함양 동호정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동호정으로 가자 넓은 바위가 먼저 반긴다. 물이 넘쳐 징검다리를 계곡을 건너기 어려워 물 건너에서 바라만 보았다. 동호정에서 다곡교 다리까지는 오르고 내리다가 나무테크로 만든 산책로가 나오기도 한다. 다곡교를 지나 1km가량 걸으면 군자정이 계곡물 건너에 나온다. 좀 더 위로 가면 봉전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계곡을 자연과 하나된 거연정이 반긴다.

 

▲ 함양 거연정

 

어떤 말로도 이 풍경을 담을 수 있을까.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한다’는 안내판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다. 정자는 이미 자연의 일부다. 다리를 건너 정자에 올라 심호흡 크게 하자 나역시 자연이 되었다. 세상에 하나둘 내려앉은 가을빛에 내 마음도 물들어간다.

 

▲ 기암괴석을 빚은, 쉼 없이 흐르는 화림동 계곡 물은 “괜찮다, 괜찮다”며 알차고 영글게 살아온 나를 위로해준다.

 

기암괴석을 빚은, 쉼 없이 흐르는 화림동 계곡 물은 “괜찮다, 괜찮다”며 알차고 영글게 살아온 나를 위로해준다. 옛 선비들이 몸과 마음을 다잡던 곳에서 마음마저 씻어주는 시원한 풍경에 일상의 찌든 때를 계곡 물에 실어 흘려보냈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된 선비의 길에서 세상일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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