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군산에서 소소한 추억 조각을 찾아 나서다

조금은 느긋한 마음을 가져도 좋을 햇살 가득한 가을. 결혼 17년 시간을 곰 삭인 우리 부부는 설움도 다디달게 익어가는 젓갈처럼 살아왔다. 바쁜 오전의 직장일 때문에 연차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점심 무렵부터 반 차를 사용한 아내와 10월 11일 짭조름한 젓갈 냄새 물씬 풍기는 전북 부안으로 떠났다.

▲ 결혼 17년 시간을 곰 삭인 우리 부부는 설움도 다디달게 익어가는 젓갈처럼 살아온 우리 부부는 전북 부안, 군산에서 소소한 추억 조각을 찾아 나섰다.

신혼여행을 제외하고는 둘만의 1박 이상의 여행은 처음이었다. 초중고에 다니는 아이 셋을 키우며 ‘가족’이라는 형태로 전국 각지를 즐겨 나들이 다녔지만 정작 우리 부부만의 온전한 나들이는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 전북 부안 청자박물관

사는 경남 진주에서 전북 부안으로 떠나는 길은 남해고속도로에 진입해 광주를 거쳐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타고도 한참을 더 갔다. 오후 1시에 출발한 차는 가는 중에 휴게소에서 잠시 점심을 먹고 길을 재촉했지만 3시간이 넘었다. 격포나들목에서 빠져나와 부안청자박물관으로 먼저 향했다.

국화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청자병 조형물 뒤로 큼지막한 청자 잔 모양의 박물관이 우리 부부를 반긴다. 2층부터 관람하라는 직원의 권유에 따라 ‘우리 도자기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구경했다. 고려 시대 부안은 수목이 울창해 땔감이 풍부하고 물과 흙이 좋아 그릇을 만들기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다. 다량으로 만들어진 부안청자는 서해의 뱃길을 따라 개경과 각 지역으로 운송되었다 한다.

 

▲ ‘정성이 꽃피운 아름다운 공유전(展)’에서 전시된 ‘청자음양각연판문합’은 11~12세기 만들어진 고려청자다. 화려하지도 않지만, 사위와 딸에게 청자 합처럼 서로 꼭 맞는 짝으로 아껴주고 덮어주며, 사이좋은 부부로 백년해로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을 담아 결혼 선물로 준 의미 있는 작품이다.

상감청자는 바탕흙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고 그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나 글자 등을 파낸 뒤 패인 홈을 백토(白土)나 자토(紫土)로 채우고 표면을 고른 뒤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운 상감기법을 이용한 청자를 말한다. 청자로 만든 보살입상과 잔 등은 은은하게 비치는 색이 매혹적이다. 청자로 구운 바둑판은 바둑을 할 줄 모르는 우리 부부지만 오목이라도 둬야 할 듯 이끈다.

청자 재현 전시실을 나오면 ‘흔히들 ’옛날 도자기‘ 혹은 ’골동품‘이라 부르는 그저 쓸모없는 옛 시대의 물건쯤으로 업신여기지만 어떤 이들은 사람보다 그것이 더 좋아 평생을 애끓게 사랑하는 이들의 소장 전시물’이 반기는 ‘정성이 꽃피운 아름다운 공유전(展)’ 나온다. 정성콜렉션 대표 김완식 선생의 전시물이다. “유물은 공산품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살아있는 역사의 생명체이지요!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소유자는 없고 관리자만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에게 유물은 아름다운 공유”라는 선생의 말에 용기 내어 가치를 찾아 눈 크게 뜨고 보았다.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백자투각엽문 곰방대받침‘이다. 곰방대 받침 위에는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다. 곰방대 받침에 잠시 놓아두면 연기가 피어올라 마치 앙증맞은 도마뱀이 연기를 뿜는 것처럼 보인 듯하다. 김완식 선생이 가장 사랑하는 유물이라는 ‘청자음양각연판문합’은 11~12세기 만들어진 고려청자다. 화려하지도 않지만, 사위와 딸에게 청자 합처럼 서로 꼭 맞는 짝으로 아껴주고 덮어주며, 사이좋은 부부로 백년해로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을 담아 결혼 선물로 준 의미 있는 작품이다. 옆에 함께 관람하는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 사진4. 부안자연생태공원에 맞은 노을

 

기념품 몇 개를 산 뒤 줄포만갯벌생태공원(부안자연생태공원)으로 옮겼다. 오후 5시 20분. 해는 뉘엿뉘엿 저 너머로 지려고 한다. 드넓은 갯벌은 인적 없다. 손 맞잡고 갯벌을 걸었다. 연분홍빛 개미취들이 이 짠내 가득한 갯벌 사이사이 우리의 동행이 되었다. 저만치에서는 사데풀이 가로등인 양 노랗게 피어 인도한다. 가을 노을을 배경으로 부부는 서로를 찍었다. 해가 지는 게 아쉬운지 하늘은 새파랗게 질렸다. 구름은 온통 넘어가는 해 주위에 몰려들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새들이 하나둘 날아간다. 오후 6시 해넘이 시각이 다가오자 승용차 하나 갯가에서 멈추고 카메라를 든 여인이 내린다. 아마도 해넘이 사진을 찍으려고 때맞춰 온 모양이다. 우리 부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까닭에 그가 찍은 사진도 덩달아 구경했다.

 

▲ 부안 곰소항 젓갈 정식

어둠이 깊어지기 전 서둘러 근처 곰소항으로 향했다.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에서 젓갈 백반을 시켜 먹었다. ‘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 썩고 썩어도 맛이 생기는 것/~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 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설움도 달디달게 익어가는 맛/ 어머니 눈물 같은 진한 맛이다/ 할머니 한숨 같은 깊은 맛이다//~’는 문병란 시인의 시 ’전라도 젓갈’처럼 짭조름하면서도 다디 단 맛을 먹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갓 잡아 올린 어물을 곰소 천일염에 버무려 1년 이상 숙성시킨 젓갈들이라 비릿한 맛이 없다. 여행의 절반은 맛이라 했던가 갯벌의 찬바람에 추웠다는 아내는 곰삭은 젓갈에 위로받는 듯 맛나게 먹는다.

 

▲ 부안 모항 새벽 5시. 어둠이 걷히지 않는 바다에 불 밝힌 어선이 수평선 너머로 향한다. 베란다에서 어선의 조명 궤적을 따라가다 어둠 속에 묻혔던 섬을 설핏 보았다. 고슴도치를 닮아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라 부르는 섬은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꿨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곳이다.

 

조금 전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오자 밤은 깊어 숙소로 잡은 모항으로 이동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모항해수욕장을 거닐었다. 바람이 찼지만 맞은 손이 따뜻했다.

새벽 5시. 눈 뜨자 창 너머로 밖을 보았다. 어둠이 걷히지 않는 바다에 불 밝힌 어선이 수평선 너머로 향한다. 베란다에서 어선의 조명 궤적을 따라가다 어둠 속에 묻혔던 섬을 설핏 보았다. 고슴도치를 닮아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라 부르는 섬은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꿨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곳이다. 적서(嫡庶) 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는 이상 사회라던 율도국을 보려고 망원 렌즈로 갈아 끼웠다. 이리저리 살피는데 “철썩~철썩” 하얀 포물을 그리며 파도가 밀려온다.

 

▲ 부안 마실길

 

느지막한 아침을 먹은 뒤 격포 채석강으로 향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달을 보며 놀았다는 채석강에서 ‘부안 마실길’을 따라 적벽강까지 걸었다. 열세 그루의 후박나무 군락을 보고 기암괴석과 해안 풍경을 길동무 삼아 걸었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송수권의 시 ’대역사‘ 중에서)’라고 시인은 노래했지만 ,책이 아니라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 올린 모양새다. 적벽강은 후박나무 군락지가 있는 격포리에서 용두산을 감싸는 약 2km의 해안선을 일컫는데 오히려 규모 면에서는 채석강보다 작지만, 오히려 더 아름답고 고즈넉해 좋다.

 

▲ 부안 적벽강은 후박나무 군락지가 있는 격포리에서 용두산을 감싸는 약 2km의 해안선을 일컫는데 오히려 규모 면에서는 채석강보다 작지만, 오히려 더 아름답고 고즈넉해 좋다.

 

바닷가 몽돌을 만지던 아내는 “얼마나 파도와 바람에 씻겨야 이처럼 몽돌이 될까” 내게 묻는다. 모 없는 몽돌처럼 자신을 다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까. 솜털처럼 가벼운 구름 위를 갈매기 두 마리 날아간다. 다시 적벽강에서 채석강으로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오가는 길, 바다가 또한 친구가 되었다. 한적한 마실길은 자분자분 걷기 좋다. 돌아온 채석강 해수욕장에는 갈매기들이 해안가를 따라 옆으로 기다랗게 앉아 쉰다. 그들 위로 경비행기가 지나갔는지 구름조차 기다랗다.

 

▲ 새만금 홍보관 3층에서 바라본 새만금방파제

 

채석강을 나와 새만금방조제 근처 새만금 홍보관으로 갔다. 3층에서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분위기 좋은 카페에 온 듯 의자에 앉아 쉬었다. 아내는 피곤했는지 의자에 깊숙이 궁둥이를 붙여 잔다. 통유리에 붙은 런던까지 9,032km, 시드니 8,155km의 숫자는 감이 오지 않는다. 토막잠을 맛나게 잔 아내와 3층에서 내려오면서 ‘고군산 군도의 물이 300리 밖으로 물러나면 이곳이 천 년 도읍이 된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시작으로 홍보관을 둘러보았다. 환경보존과 개발의 논란 속에 공사 기간 19년이 걸린 새만금방조제는 서울 여의도 14배의 면적으로 경부고속도로 4차선을 13m 높이로 쌓을 수 있는 흙을 쏟아붓고야 만들었단다.

 

▲ 군산 무녀도

 

속도를 줄여 방조제 위를 내달려 신시도 휴게소에서 멈춰 숨 고르며 주위 풍광을 보았다. 무녀도까지 다리가 놓이고 부분 개통한 도로를 달렸다. 주위에는 자전거로 이 풍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 군산 근대건축관

 

방파제를 나와 군산 시내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근대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근대역사박물관 근처에는 근대건축관, 미술관, 진포해양공원이 걸어서 5분 이내 거리에 있었다. 먼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을 개조해 만든 근대건축관으로 들어갔다.

1945년 미군 폭격기에 침몰한 일본 화물선에서 건져 올린 홍콩 주화 106만 567개 중 일부 뒤로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문구가 우리 겨레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 군산 근대건축관에는 1945년 미군 폭격기에 침몰한 일본 화물선에서 건져 올린 홍콩 주화 106만 567개 중 일부가 전시 중이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 조선인에게 외우게 했던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로 시작하는 일본어로 쓰인 ’황국신민서사‘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탈의 흔적, 부끄럽지만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이 건물에 오롯이 남아 있다.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과 근대건축관, 미술관, 진포해양공원은 걸어서 5분 이내에 있어 찬찬히 근대 역사를 공부하기 좋다.

 

일본 18은행 군산지점을 미술관으로 개축한 군산근대미술관을 둘러보고 근대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커다란 문구가 정면에 있고 왼편으로 어청도등대 모형이 먼저 반긴다. 오른쪽부터 군산의 역사부터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의 군산을 재현한 3층까지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탁류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리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중에서)’는 말처럼 군산에서 근대역사를 살피는 기회였다.

 

▲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왔고, 허름한 토막집에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잇는 빈민이 되지만 일본인 지주들은 커다란 부를 축적하며 살았다고 한다.

193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셈이다. 당시 조선 농민들은 일본인 농장이 확대되면서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 오로지 쌀 증산을 위해 통제와 감시받으며 살았다.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왔고, 허름한 토막집에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잇는 빈민이 되지만 일본인 지주들은 커다란 부를 축적하며 살았다고 한다.

 

▲ 고속도로 진안휴게소에 만난 마이산과 마이산 조형물

 

군산에서 진안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는데 진안휴게소에서 멈췄다. 휴게소에 세워진 정자, ‘마이정’에 올라 마이산과 함께 해넘이를 구경했다. 자연이 서쪽 하늘에 가을 명화를 그렸다. 이 시각 오늘 낮에 둘러본 채석강이며, 적벽강도 노을에 붉게 타올라 황혼이 빚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가을 노을과 함께 우리 부부의 1박 2일의 시간도 흘러간다.

 

▲ 자연이 서쪽 하늘에 가을 명화를 그렸다. 가을은 여행이다.

 

이 계절 익숙하기 전에 다시 채비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푸른 하늘과 청량한 바람이 부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다고 했다. 붉게 타는 나뭇잎이 빚은 가을 강을 만나러 떠날 참이다. 우리 부부는 여행 길목에서 마주한 소소한 추억 조각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가을은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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