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기림상 건립 진주지역추진위원회에서 개최하는 진주지역 일본군 '위안부' 시민 토론회를 앞두고 발제문을 미리 재정리한 것이다. 시민토론회는 27일 오후 7시 YWCA 3층 강당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진주와 관련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11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주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관련 사업은 체계적이지 못했고 지속적이지 못했다. 진주여성민우회에서 할머니들 그림전을 개최했었고 2003년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지역 모임과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경남 서부지역 할머니들을 찾아뵙기도 했었으나 꾸준히 이어지지 못했다.

▲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한 진주 출신 위안부 화가 강덕경의 증언 모습.

현재의 진행중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기림사업은 2015년 5월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윤미향 정대협 대표의 강연의 결과물이다. 강연회에서 제안된 지역별 기림사업을 위해서 진주인권센터는 진주지역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자료 정리를 시도했고 이를 기초로 지역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기림사업을 제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군 ‘위안부’는 모두 몇 명일까?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이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1993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이 제정되어 정부차원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등록과 지원을 시작했다.

1993년 153명이 등록을 했으며 이후 2014년까지 꾸준히 등록을 하여 2016년 7월 10일 현재 238명이 등록되어 있다. 이 중 생존자는 40명이며 국내 거주자는 38명이다. 국내 거주자는 서울과 경기도에 12명 경남 6명, 대구 3명, 부산, 광주, 울산, 충남, 충북, 경북에 각 1명 있다.

일본군 위안소는 1931년부터 설치되어 운영되었고 약 2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이 중 부산경남 사람들은 징용자 중 부산경남인 비율 22%을 일본군 ‘위안부’에 준용하면 약 4만4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끝내 밝히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간직한 채 못 밝히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신 238명의 할머니들 중 진주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분들은 11명이며 본적지와 끌려간 장소, 최종 주소지는 아래와 같다.

《진주관련 위안부 할머니》

연번

이름

최종주소지

본적

끌려간 장소

1

하순녀

부산

경남 진주

광주

2

손판임

서울

경남 삼천포

경남 하동

3

최순월

함양

경남 함안

경남 진주 본성동

4

배영자

전남 여수

경남 하동

경남 진주

5

김경애

마산

경남 마산

경남 진주 옥봉동

6

이우율

부산

경남 진주 옥봉동

진주시 옥봉동

7

임정자

마산

경남 산청

경남 충무 태평동

8

김연이

부산

부산 기장

전남 고흥

9

강도아

진주

경남 산청

경남 하동

10

김순이

진주

경남 하동

경남 하동

11

강덕경

서울

경남 진주

경남 진주

 

11명의 할머니들 중, 진주에서 끌려간 사람은 5명(최순월, 배영자, 김경애, 이우율, 강덕경)이다. 최순월은 본성동에 과부로 살다가 위안부로 끌려갔다. 배영자는 하동으로 시집갔다 남편의 외도가 심해서 진주로 가출했고 진주에서 끌려갔다. 김경애는 옥봉동에 살았고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정신대 징집을 피해서 개성 고모집으로 피신을 했었고 1944년 옥봉동 사무소 직원들이 강제로 끌고갔다. 이우율은 옥봉동에 살았고 공장직공을 모집한다고 신청해서 따라갔다. 강덕경은 진주초등학교 고등과에 재학중이었고 일본인 교사의 권유로 일도하고 돈도 벌수 있다고 하여 정신대에 친구와 자원했다.

귀국 후에 진주에 거주한 사람은 3명(강도아, 김순이, 손판임)이다. 세 명 모두 하동출신이다. 손판임은 귀국 후에 진주에서 지냈다. 강도아는 본적은 산청이나 하동태생이다. 14살에 취업사기로 끌려가 대만, 인도네시아에 끌려다녔다. 귀국후 진주에 계속 살았으며 임종직전 마산요양원에서 지냈다. 김순이는 귀국후 고향 하동에서 지냈으며 1989년부터 진주에 거주했다. 자료상으로 11명 중 유일하게 고향에서 지냈다.

진주 연고자는 3명(하순녀, 임정자, 김연이)이다. 하순녀는 진주 출생이나 바로 영암으로 이사했다. 영암 집으로 귀국했고, 광주에서 남의집살이을 했다. 임정자는 1922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생활고로 부모와 함께 부산으로 이주했다 통영으로 옮겼다. 1938년경 일본남자가 취직 권유를 해서 부모들이 거부하였으나 강제로 끌려갔다 1942년 귀국했다. 김연이는 귀국하여 진주에 왔으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평남으로 갔다.

▲ 강덕경의 작품 "뺏앗긴 순정" 일본이 여성들의 해골위에 꽃피우고 있음을 표현했다.

 

남편, 아버지가 없고 가난한 집 여자들이 끌려갔다!

조선인 여성을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한 방식은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등이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하였다.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였고, 일본군과 경찰 역시 동원 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경위》

이름

끌려간 경위

김경애

봉래동(옥봉동) 사무소 직원들이 강제로 끌고 감.

이우율

취업사기 - 공장 직공 모집

임정자

취업사기 거부 후 납치

강도아

취업사기

강덕경

학교 선생님 권유, 취직 겸 유학

 

11명 끌려간 경위가 기록된 할머니는 위와 같이 5명이다. 이 중 정신대 징병을 피했다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강제로 끌려간 김경애를 제외한 4명은 모두 취업사기로 끌려갔다. 또 5명 중 보통학교 고등과에 재학중, 취업겸 유학을 미끼로 정신대에 자원했던 강덕경을 제외하면 모두 경제적 형편이 상대적으로 더욱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으로 추정된다.

진주에서 끌려간 5명을 보면 도시 지역에서 사회적 약자가 더욱 취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순월(과부), 배영자(별거), 강덕경(한부모 가정)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배제된 사회적 약자였다.

진주지역에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가장 큰 특징은 헌병이나 경찰력이 아닌 다른 일상적인 공권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강덕경은 재학중인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근로정신대에 자원했으며 김경애는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강제로 끌려갔다.

▲ 강덕경의 작품 "사죄"

 

진주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현재는 과거와 다른가?

진주와 관련된 11명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중에 현재 생존자는 없다. 정대협으로부터 받은 할머니들 관련 자료는 소략했고 언론보도와 인터넷 공개정보들을 취합하여 정리했다. 그러나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진주지역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행적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진주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하는데 주로 이용된 방식은 취업사기였다. 사기가 통하지 않을 경우 납치까지 했다. 그 주요 대상은 빈곤층이었으며 특히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배제된 과부, 독신녀, 한부모 가정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노렸으며 그 과정에서 경찰, 헌병 이외에 동사무소와 학교 교사 등이 적극적으로 위안부 동원에 참가했다.

과부, 독신녀, 빈곤여성(아동)들은 사기 대상이 되었고 가부장제 관습으로 유력한 동원의 대상이 되었으며 관공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 중 고향에서 지낼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진주가 고향인 강덕경은 어머니의 강권으로 부산에 가서 살았고 아이가 죽은 이후 전국을 돌아다녔다. 김연이는 부모가 돌아가셔서 평남으로 갔으며 하순이는 광주에서 남의집 살이를 해야 했다. 임정자는 뒤늦게 결혼했으나 남편으로 구타를 감내하며 지냈다. 강도아는 하동을 떠나 진주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나 난소암으로 마산요양원에서 죽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그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했고 등떠밀어 보냈으나 돌아온 이들이 쉴 곳조차 마련해 주지 못했다. 진주에 오랫 동안 사셨던 강도아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에서 마지막을 보내드렸다.

일본군 ‘위안부’ 기림상은

진주시민의 부끄러움을 돌아보는 기념물이 되어야 한다!

진주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기림상을 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를 해야만 한다.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이웃의 따뜻한 마음을 내지 못했던 진주지역 시민사회의 자기반성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미숙하여 이웃을 돌아보지 못했고 쉴 수 있도록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역 관공서의 사과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우리 지역의 동사무소 직원이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를 보냈고 학교의 교사는 정신대를 거짓 선전하며 권유했다. 학교는 거창한 환송회를 개최해 주었다. 이러한 행위들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그 행동은 학교와 진주시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해당 관공서는 이에 대해 정확히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주시의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다. 진주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 기림상 건립을 위한 부지제공 요청에 대해 “검토결과 진주시내에 적절한 부지가 없다.”라고 회신을 주었다.

▲ 일본군 '위안부' 기림상 부지로 제공할 땅이 없다는 진주시의 회신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한 강덕경은 졸업생 명부에 그 이름이 없어서 그녀의 증언 중 일부가 의심받았습니다. 이에 그녀가 졸업한 것으로 주장한 1942년 전후 3년의 졸업생 학적부 원본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진주초등학교는 개인정보를 이유로 학교에서 강덕경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확인해 준 1942년 졸업생 1명의 학적부만을 열람할 수 있었다. 학교측에서 제공한 학적부의 내용과 강덕경의 증언이 상당히 일치했다. 그러나 더욱 정밀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강덕경의 졸업연도인 1942년을 전후로 3개년 학적부 자료에 대한 전수조사를 거부했다. 학교는 전수조사를 원한다면 1941년~1943년 사이 3년사이 졸업한 여학생 349명의 동의를 받아 오라고 했으며 조사는 거기에서 중지됐다.

▲ 진주초등학교 정신대 환송기념 사진. 1944년 경으로 추정. 맨 앞의 키 큰 3명이 정신대 입대자. 이들 중 한명이 강덕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의 관공서들이 행정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앞장서서 강권하거나 강제해서 자신들에게 소속된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번 진주지역 일본군 ‘위안부’ 기림사업은 많이 늦었고 부족하지만 시민사회는 시민사회의 방식으로 관공서는 관공서는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고 미래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난 2016년에 개정된 “일제하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日帝下日本軍慰安婦被害者─對─生活安定支援─紀念事業等─關─法律]”의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등의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 국가는 지방자치단체가 기념사업 등을 수행하는 경우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개인·법인 또는 단체가 기념사업 등을 수행하는 경우에 경비를 보조할 수 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법인이나 단체가 기념사업을 수행하는 경우에 국유재산 또는 공유재산을 무상으로 대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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