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디 울림통] 2016 '제2회 남강 가림막 유등축제'를 앞두고

1969년 10월, 소년은 생전 처음 개천예술제 구경에 나섰다. 호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리 멀지 않은 시골에 살면서도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생각만 하고 듣기만 한 잔치판이었다. 진주교도 지금과는 다르고, 그 주변도 지금과는 판이했다. 진주교에서 선학산 아래 뒤벼리까지는 거의 빈터였다. 그러니 거기에 곡마단이 진을 치고 난장이 서고 했다. 잔치가 시작되는 날 밤에는 유등을 띄우기도 했다. 불꽃놀이도 있었던 것 같다.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은 서커스였다. 얼마를 주고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우스운 복장과 분장을 한 여리꾼이 종이나팔을 들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그 옆에는 보기 어려운 동물들도 눈길을 끈다. 안으로 들어가니 참으로 낯선 장면들이 펼쳐진다. 노래도 부르고, 만담도 늘어놓고, 곡예도 이어진다. 흙바닥에 앉아서 구경하는 내내 웃으면서 손뼉치고 했다. 한쪽 구석에는 어묵이 김을 뿜고 있었다. 혼자 나선 소년은 어묵을 입에 물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 다음은 촉석루 주변 구경이었다. 촉석루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노점 들이 발길을 끌어당겼다. 온통 생전 처음이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떡볶이이다. 설날이라야 볼 수 있는 가래떡보다 짤막하고 가는 것이 붉은 양념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아닌가. 저건 또 뭔가 싶었다. 돈을 10원인가 내면 화살을 두 번인가 쏠 수 있단다. 그리고 그 화살이 맞춘 숫자만큼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니, 모험심이나 승부욕이라고는 없는 소년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 재미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임진계사순의단이 있는 맞은편에 야외무대가 있었다. 거기서는 노래자랑이 며칠을 두고 열렸다. 입담도 구성진 이가 마이크를 잡고 신청한 사람들을 무대로 불러올린다. 그때 유행하던 노래를 마음먹고 부르는 사람들과는 달리 심사하는 이들은 냉정했다. '범띠 가시내'라는 영화 주제가가 유행하던 시절. 두어 소절도 부르기 전에 ‘땡!’ 소리가 나면 황급히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 그러나 어떤 이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항의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 청중들이 호응하기도 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어떤 이는 ‘땡해도 나는 좋아 끝까지 부를 테야’라면서 넉살을 부리기도 했다. 참가비에 눈이 멀어 저렇게 땡을 친다고도 했다. 입상권에 드는 사람은 가수협회 회원증을 준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무대를 선망했을까?

그 시절 잔치가 열리면 기차역이 인파로 넘쳤다. 중앙로터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시외버스 차부에는 잔치판에 가담하려는 이들로 붐볐다. 엄밀히 말하면 남강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개천예술제 주요 행사는 아닌 게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개천예술제는 남강과 함께했다. 그래서 나온 우스개가 있으니, 개천예술제를 '개천에 술제'라고 했다. 그렇게 이어져 오던 잔치판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유등축제와 짝이 되었다. 그렇게 10여년 유등축제와 짝이 되면서 개천예술제는 뒤로 밀리고 말았다. ‘전국 최초’ 향토문화제는 남강에 떠 있는, 흐르지 않는 유등에 그 자리를 내줘야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낮은 없고 밤만 있는 유등축제가 남강을 뒤덮고 말았다.

그러고 또 세월이 흘러 그 유등축제는 가림막 축제로 변신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가림막을 치고 돈을 받겠단다. 과정이 생략된 결정이라고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통과 먹통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차근차근 가림막을 치고 장벽을 쌓았다. “장막을 걷어라! 부분유료화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라고 외쳤지만 그들에게는 소귀에 경을 읽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자마자 ‘성공한 유료화’라고 찌라시에 도배를 하고, 앵무새들이 짖어댄다. 짜놓은 각본이 있었던가? 해가 바뀌면서 "장막을 걷어라! 부분유료화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여론 조사를 해 보았다. 시민들의 생각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장막을 걷어라! 부분유료화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에 동의했다. 때가 되면 거리에 나서서 글자판을 들고 외쳤다. "장막을 걷어라! 부분유료화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올해는 작년과 같은 가림막은 없다.”라고 했는데, 그래서인가? 과연 진주교와 천수교에는 가림막이 아니라 ‘가림등’이 설치될 모양이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고, 밤에는 LED등을 켜서 유등을 볼 수 없도록 한다는 것 같다. 뱉은 말을 실천하는 정직함인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여서 이러고 있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제대로 돌아갈까? 과연 얼마나 시민들을 주인으로 하는 축제인가? 앞뒤가 맞는 말을 하고, 올바른 계산을 하고 있기는 한가?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무르익어갈 즈음이면 개천예술제를 그리며 진주시민은 물론 진양군민과 인근 지역민들은 설렜다. 아주 많이 설렜다. 풍년이라도 들면 마치 추수감사제를 올리듯이 ‘개천에 술제’에 참여 했다. 참여해야만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지고 말았다. 자기 이름이 붙어 있는 소망등을 구경하려고 해도 주말에는 입장료를 내야 볼 수 있다. 진주에서 벌어지는, 남강에 흐르는 불빛을 보러오겠다는 친지가 있어도 청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가리고 나누고 하는 축제라서 그렇다. 흐르지도 않는 유등이 잔치판을 뒤엎고 만 것이다. 잔치판은 장사판이 되고 말았다. 설렘이 사라진 축제가 되고 말았다. 없어진 설렘을 되살리는 일은 어디서부터라야 할까?

함께 나서야 한다, 설렘을 되찾는 일에. 반드시 ‘생각만 해도 설레는 잔치’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은 소년은 그 시절 잔치판 개천예술제를 그리며 한없이 설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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