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 첫번째 - 김준형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경남 진주시가 조성 계획인 '진주대첩기념광장'이 지금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진주대첩기념광장은 진주시가 진주대첩을 기념해 새로운 랜드마크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논란의 시작은 진주시가 진주성 촉석문 앞에 있는 형평운동기념탑 이전을 요구하면서였다. 형평운동기념탑은 1996년 시민성금으로 세운 것으로, 진주에서 시작된 1923년 백정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기념하는 탑이다.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과 관련해 진주지역 시민단체, 교수 등이 문제를 적극 제기, 단디뉴스에서는 김준형 경상대 사범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앞으로 3~4회에 걸쳐 이들의 릴레이 기고를 시작한다. - 편집자

 

▲ 김준형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현재 진주 지역사회 내에서는 ‘진주대첩기념광장’ 조성사업을 둘러싸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 사업은 원래 진주성 촉석문 앞 2만 5000㎡의 부지에 기념광장을 조성하고 역사관․홍보관․체험시설 및 주차장 등을 조성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진주시에서는 ‘비움’이란 컨셉을 내세워 광장 위에는 아무런 건축물을 세우지 않고 잔디밭을 조성하고 지하에 기념관 등 일부 시설과 주차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언뜻 수긍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자세히 뜯어보면 이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현재의 진주성 주변이 ‘진주대첩기념광장’이라 명명할 수 있을 만큼 그 유명한 진주대첩을 상상할 수 있을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은 현재의 성보다는 훨씬 컸다. 현재의 진주성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장대동 놀이터까지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그 끝에 동문이 세워져 있었다. 1,2차 진주성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진 곳은 동문 주위였다. 다른 곳은 왜적의 간헐적인 공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동문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진주성의 규모는 2차 전투에서 순국했다고 하는 군사와 민간인 6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작다. 따라서 진주성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지금의 진주성을 둘러보며 진주성 전투를 상상한다면, 잘못된 인식을 할 우려가 크다.

게다가 성내에는 임진왜란 때 저항의 핵심 지휘소를 비롯한 여러 시설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잔디밭만 조성되어 있어 진주성 전투를 상상하기에는 너무 허전한 느낌을 준다. 촉석루라도 보면 될 것이라고 변명할지는 모르지만, 촉석루는 당시 지휘소가 아니었다. 그 곳은 관리나 선비들의 유락과 숙식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북장대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진주성 안에 들어가 무엇을 보며 치열했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까.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광장이 진주대첩만 강조하는 모습을 취하다 보면, 진주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알리지 못하고 너무 협소화되어버릴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진주는 우리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주목되는 역사적 사건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조선시대 이후만 하더라도 진주성 전투 이외에 조선 말기 진주농민항쟁, 일제 강점기에 전개된 농민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 등의 사회운동에서 전국적으로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사례가 적지 않다.

조선초기에는 조정의 장상(將相)의 반이 영남 출신이고 영남 출신의 반이 진주 출신이었다는 말이 유행되었듯이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런 배경 하에서 진주가 남명학파의 본고장이 될 수 있었다. 또 구한말 이후 얼마동안은 진주가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로서 역할하였고, 성내 우병영 자리에 감영이나 도청이 있었다.

따라서 광장에는 이처럼 자랑스런 진주의 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역사관을 건립하고 이와 관련된 각종 기념탑이나 조형시설들도 광장 곳곳에 세워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진주 시민뿐만 아니라 진주를 찾는 여행자들이 이 광장의 역사관과 조형물을 보고 진주 역사․문화의 종합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진주성의 규모와 모습은 여러 차례 변해 왔다. 불행하게도 조선초기와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의 모습이나 성내에 설치된 건축물들은 극히 일부 외에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행히 조선후기 진주성의 모습은 20종의 ‘진주성도’(晉州城圖)가 있어서 조선 후기 중요 건물을 복원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우병영 등 일부 건물이나마 복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또 진주성 전투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문과 옹성은 발굴을 거쳐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진행해 간다고 할 때, 시민들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꼼꼼히 챙기는 과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중요한 사업들이 진주시의 행정 담당자의 일방적인 결정이나 형식적인 논의 절차만 거쳐 결정되는 것은 진주가 역사․문화의 도시로서 새롭게 부각되는 데 여러가지 장애만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당국자는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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