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엄정화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감우성이 주연한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는 개봉 당시 상당한 파란을 일으켰다. 베드신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것도 화제가 됐지만 제목과 내용이 주는 충격이 컸다.

결혼은 '필수'라고 여겼던 통념을 깨는 데 그치지 않고 '미친 짓'이라 말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내용은 더 파격적이었다. 남자가 바람 피우고 여자가 매달리던 '신파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엄정화(연희)는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 감우성(준영) 자취방에 찾아와 섹스를 했다. 그러면서 천연덕스럽게 '안 들킬 자신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 때문에 한국에서 결혼율이 더 떨어졌을까마는 적어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젊은층의 인식 변화는 제대로 보여줬다고 본다. 엄정화가 분한 연희는 대한민국 마초남들에게 박탈감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일베' 언어로 '김치녀'라 불릴 수 있는 대표적 캐릭터다. 연애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하고서 나중엔 조건을 찾아 의사와 결혼한다. 결혼 후에는 아무런 구애 없이 옛 남자와 연애를 지속한다.

영화가 나온 지 14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 청춘남녀는 급속도로 자유분방해지고 한편으로 삶은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일자리는 더 줄었고, 더 나빠졌으며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시스템에 도전하지 못한 채 피해의식만 키우다가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골라 분노를 토해낸다. 행정부에 여성가족부가 생겨났지만 오히려 공격 대상이 되고, 군대 가산점, 남성연대 논란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어느새 파시즘이 횡행하게 됐다. '여혐'이 일부 찌질한 루저들의 일탈인 줄만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공중파 방송에서 개그맨이 여성 비하 발언을 하고, 아저씨들은 아이돌 그룹의 섹시코드를 소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마치 사회전체가 불안한 고용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화풀이 상대로 여성을 지목하고 소비하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떠나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사건과 추모 물결은 한국사회를 '여성 혐오' 논란으로 뜨겁게 달구고 있다.

모순이 있는데도 미동 없이 조용한 것보다는 시끄러운 것이 훨씬 낫다. 하지만 논쟁의 방향이 마뜩잖다. 여성혐오와 반작용으로 탄생한 남성혐오가 마치 확성기를 맞틀어 놓은 남과 북처럼 상호 비방과 폭력적 언사를 늘어놓지만 갈등을 해결할 접점은 찾지 못하고 있다.

남녀 차별 문제는 자본과 노동 간의 대결 구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뒤엣것이 적대적 관계라면 남과 여는 차별과 억압 구조의 피해자들이다. 가해자는 물론 자본과 그를 대변하는 국가시스템이다. 더 나쁜 일자리와 더 쉬운 해고, 열악한 복지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 거대악은 '여혐' '남혐'이 벌이는 진흙탕 싸움 뒤로 가려진다.

모든 차별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차별받는 이들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사건 주변 공간을 가득 메운 추모 메시지들은 여성들이 충분히 자각하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 필요한 것은 연대다. 하지만 연대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 연대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 일반이 피해자이고 남성 일반이 기득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또한 차별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대다수의 가해자 성별이 남성이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진정한 연대를 위해서는 말로만 그치지 말고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뒤집은 영화 속에서도 준영의 자취방에서 집안일은 언제나 연희의 몫이었다. 가사분담에 대한 대화에서 비혼주의자 준영은 "커피타기와 설거지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짓을 하기 싫어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커피 타기와 설거지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으로 사랑과 연대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하루 30분을 밑도는 세계 최하위 수준의 남성 가사분담률부터 돌아볼 일이다. 나 또한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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