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글랫저의 <스틸 앨리스>는 '나이듦'과 '비움'에 관한 영화이다. 알츠하이머가 가져다 주는 '상실'의 가혹함을 보여준다. <스틸 앨리스>는 미국의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의 처녀작을 원작으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연구와 환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줄리안 무어는 <스틸 앨리스>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언어학과 교수를 연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스틸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는 컬럼비아 대학 언어학과의 저명한 교수이다. 그녀의 연구는 언어학계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녀가 자주 깜빡깜빡하고 짧은 단어나 이름 같은 걸 잊고 갑자기 멍해지는 일이 많아진다. 20년 넘게 다니던 캠퍼스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 길을 헤매기도 한다. 신경외과 의사 데이비스는 이제 갓 50살인 그녀에게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내린다. 앨리스는 남편 존에게 자신의 질병을 고백하며 울분을 터뜨린다. "젠장, 왜 내 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거야? 내가 느낀다니까! 내가 잘 알아! 뇌가 죽어가는 기분이란 말이야! 내가 평생 이룬 것들이 사라질거라구! 전부 다......"

앨리스는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녀는 온전히 그녀 자신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버텨내지만 그 비참한 기분은 어찌할 수 없다. 그녀는 암과 알츠하이머병을 이렇게 비교한다. "암 환자의 대머리와 핑크 리본은 용기와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어눌한 말투와 기억력 감퇴는 정신이 불안정하고 실성이 임박했음을 나타낸다. 암환자는 주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나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추방자가 된다.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라도 정신질환자에겐 두려움을 느끼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앨리스는 두 가지 약을 처방받는다. 아리셉트와 나멘다인데 이들은 증상완화와 질병의 진행을 늦춰줄 뿐 알츠하이머병을 완치하거나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어느 누구보다도 똑똑하지만 앨리스는 그녀의 일부가 하나 둘씩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막내딸 리디아가 그녀에게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질문하자 앨리스는 슬픈 눈으로 대답한다. "난 지금껏 항상 내 지적능력과 언어, 표현에 명확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내 앞에 단어들이 걸려 있어도 잡지도 못하겠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뭘 더 잃게 될지도 모르겠구."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확인하기 위해 신경외과 의사 데이비스는 앨리스에게 간단한 질문들을 한다. "제가 이름과 주소를 말할 테니 그대로 말해보세요. 그리고 조금 있다 또 그 이름과 주소를 얘기하시면 됩니다. 자 준비 되셨죠? 존 블랙, 호보켄, 워싱턴 스트리트 42번지. 그대로 말씀해 보시겠어요?" 첫 번째 시도에서 앨리스는 완벽하게 대답한다. 다른 질문들로 10여분이 지난 후 데이비스는 다시 질문한다. "좋아요. 아까 제가 말했던 이름과 주소가 뭐였죠?" "존 블랙......이런 생각이 안나요."

알츠하이머병의 진단은 간이정신상태 검사 (mini-mental status examination, MMSE)에 의한다. 간단하고 쉬운 질문들에 답하도록 하고 정답 모두 맞추면 30점, 24점 이하이면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한다. 초기 알츠하이머병 (MMSE 21-24점; 경도) 은 최근 일에 대한 기억력 감퇴와 정확한 용어나 단어 사용에 어려움으로 시작된다. 중기 (MMSE 10-20점; 중증도) 를 지나 말기 (MMSE 0-9점; 중증) 로 갈수록 언어능력 상실, 자아상실, 대소변 못 가림, 음식물 저작 및 연하곤란이 나타나 24시간 도우미가 필요하다.

앨리스의 알츠하이머병은 조발성이다. 보통 알츠하이머병의 유병률은 65세를 기준으로 5세가 증가할 때 마다 거의 2배씩 증가하지만,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은 40-50대 연령층에서 나타난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은 가족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자의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이 그 자녀에게 유전될 확률이 50%이다. 앨리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유전자 돌연변이 검사를 권한다. 세 가지 유전자 APP (Amyloid Precursor Protein; APP), PS1 (Presenilin 1), PS2 중 하나 이상의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할 경우 알츠하이머병이 유발된다. 안타깝게도 첫째 딸 안나가 유전자 검사에서 PS1 돌연변이 양성 반응을 나타낸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로 자주 통용되지만 엄연히 따지고 보면 이 둘은 다르다. 치매 (dementia) 란 나이가 들면서 인지기능의 손상 및 인격의 와해가 발생하는 현상이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이다. 보건복지부의 "치매노인유병률조사 (2012)" 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에 의한 치매가 71.3%, 혈관성 치매가 16.9% 의 유병률을 보인다. 그밖에 치매의 병인에 따른 분류로는 혈관성 치매, 루이소체 (Lewy body) 치매, 전측두엽 치매 등이다.

한때 의사소통에 푹 빠져 살던 앨리스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들은 "끈끈한 아밀로이드 덩어리"에 갇혀 버리기 때문이다. 끈끈한 덩어리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  (β-amyloid protein; Aβ) 의 축적체이며 이는 알츠하이머병의 분자생물학적 병인이다.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는 신경반 (neuritic plaque; 노인반 senile plaque) 은 과인산화된 tau 단백질 덩어리와 함께 신경섬유 농축 (neurofibrillary tangle; NFT) 을 형성한다. 이 신경섬유 농축은 신경세포 사멸을 유발한다. 파멸에 가까운 신경세포들의 사멸은 대뇌 피질과 전두엽, 측두엽의 구조와 기능에 손상을 입혀 인지기능과 정신기능에 영향을 준다.

뇌의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 변화는 알츠하이머병을 진행시킨다. 특히 아세틸콜린 (acetylcholine; ACh) 농도 저하는 약물치료학적으로 중요한 타깃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에서는 전뇌 바닥 (basal forebrain) 에 있는 마이너트 기저핵의 콜린성 신경세포의 파괴가 두드러진다. 그 결과 마이너트 기저핵이 연결된 대뇌 피질, 해마, 편도체에서 콜린아세틸전이효소 농도, 콜린 재흡수 저하로 아세틸콜린 농도가 심각하게 떨어진다. 따라서 이들 뇌 조직이 관장하는 인지 기능이 상실된다.

알츠하이머병의 인지증상 치료는 대증치료에 속하는 개념이다. 즉, 감기 걸렸을 때 항바이러스제를 쓰지 않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물 많이 마시고 비타민 C를 많이 섭취하라는 것과 같다. 그녀의 알츠하이머병은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 남편 존의 걱정 어린 질문에 데이비스는 이렇게 위로한다. "환자마다 다릅니다만 가족성 조발성 치매의 경우 그 진행 속도는 빠릅니다. 그리고 교육 수준이 높은 환자일수록 진행 속도는 더 빠릅니다. 종종 그런 분들은 뛰어난 지성으로 인지장애 진행을 버텨내서 진단이 늦어지기도 합니다. 앨리스도 기억을 잃고 있지만 질병에 대한 지략이 뛰어납니다."

FDA 승인을 받은 알츠하이머병 인지증상 치료약은 5가지이다. 1906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 Alois Alzheimer가 이 질환을 처음 보고한 이래로 한 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사용 가능한 약은 고작 한 줌이다. 앨리스가 처방 받은 약 중 하나인 아리셉트의 성분은 도네페질 (donepezil) 인데, 1983년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1996년 FDA 승인을 받아 시판되었다. 이 약은 아세틸콜린 분해효소를 가역적으로 억제하여 아세틸콜린의 농도를 증가시키는 아세틸콜린 분해효소 억제제이다. 아리셉트는 뇌에서 선택적으로 작용하며 반감기가 70시간으로 하루 한 번 복용 가능하다. 위장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주로 취침 전에 투여하나, 불면증, 악몽, 생생한 꿈 등의 부작용 발생 시 아침에 투여하기도 한다.

앨리스의 알츠하이머병은 중증도이다. 그녀가 복용하는 다른 약인 나멘다는 경증에는 사용할 수 없고 중증도 이상의 알츠하이머병에 사용한다. 나멘다의 성분은 메만틴 (memantine) 으로 NMDA (N-methyl-D-aspartate) 수용체 차단제이다. 흥분성 신경전달 물질인 글루타메이트 (glutamate)가 과량 분비되면 신경세포 손상이 유발되어 알츠하이머병을 포함한 신경퇴행성 질환이 발병한다. 글루타메이트는 NMDA 수용체의 칼슘 채널 (calcium channel) 을 열어 신경세포 내로 칼슘을 과량 유입시킨다. 나멘다는 이 칼슘 채널에 길항제로 작용하여 신경세포 안으로 과도한 칼슘 유입을 차단한다. 따라서 신경세포의 기능은 정상화된다. 나멘다도 아리셉트와 마찬가지로 반감기가 60-80시간으로 비교적 길다. 부작용으로 어지러움증, 환각, 두통이 5% 정도의 환자에서 나타난다.

앨리스는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매일 오전 8시 알람 소리에 맞춰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들을 체크한다. "당신 첫째 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살고 있는 거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생일은 몇 월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병원에서 미리 처방 받아온 수면제 몇 십 알을 입안에 털어 넣을 작정이다. 앨리스를 어여삐 여긴 신의 손길일까. 알츠하이머병은 자살시도조차 엉망으로 만든다.

▲ 존과 앨리스

존은 앨리스를 사랑으로 돌보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앨리스도 존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는 그가 가진 열정의 대상이 되고 싶지만 그를 다그치지 않는다. 존이 이미 많은 희생을 치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의 보호자는 우울증이나 다른 신체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 따라서 보호자도 도움이 필요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치매 환자들과 관련한 뉴스들이 즐비하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2007년 치매 환자가 배회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철도 회사는 열차 출발이 늦어졌다며 가족들을 상대로 720만엔, 즉 7천여만 원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철도회사의 책임도 있다고 항소를 냈다.

급속한 인구의 고령화로 치매 유병률이 증가하고 있다. 2010년에는 8.74%이었으나 2015년에는 9.79%, 2040년에는 11.9%로 치매인구가 2백만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2006년 2천 7백만명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았고, 2050년경에는 1억명이 넘는 인구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1996년 3월에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노인ㆍ장애인복지 종합대책’에서 ‘치매노인 10년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 내용에는 치매상담신고센터, 치매전문요양시설, 치매전문병원, 치매종합센터 등을 설치 및 운영하는 것이다. 이는 각 시도지자체에서 치매예방관리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밖에도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스틸 앨리스>라는 제목은 그녀에게 주는 가장 큰 찬사이다. 일상을 잃어가지만 그 일상에 묵묵히 충실한 그녀이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연례 치매 조호 학회에서 그녀의 상실에 대해 연설한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애쓰고 있을 뿐이라는 그녀는 상실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더욱이 그녀는 가까운 미래에 알츠하이머병이 완치되리라 믿는다. 그녀의 믿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전세계적으로 치매 치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올 연초에 생물학적 제제인 간테네루맙 (Gantenerumab), 솔라네주맙 (Solanezumab), 크레네주맙 (Crenezumab) 이 임상 3상 시험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이들은 알츠하이머병을 유발하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직간접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츠하이머병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언하건대, 앨리스의 첫째 딸 안나가 가진 PS1 돌연변이 유전자는 그녀의 노년을 잠식하지 못할 것이다.

[참고] 1. Lippincott Illustrated Reviews: Pharmacology 6th edition.
 2. Pharmacotherapy: A Pathophysiologic Approach, 8e

⚫ 감독: 리처드 글랫저

⚫ 주연: 줄리안 무어 (앨리스 役), 알렉 볼드윈 (존 役), 크리스틴 스튜어트 (리디아 役), 케이트 보스 (안나 役)

⚫ 수상이력: 제 6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줄리안 무어), 제 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줄리안 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