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진성면 용고미를 찾아서

볕 좋은 날이었다. 바람 한점마저 엉덩이를 들썩들썩 이게 하는 날이었다. 어디론가 훌쩍 봄 마중 떠나고 싶은 3월 3일 들썩이는 마음은 봄 마중을 마다하고 경남 진주 진성면 용고미 마을로 향하게 했다. 아내를 아홉 번이나 내쫓고도 나라에서 칭찬을 받은 사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 진주 금산면과 진성면의 경계에 있는 월아산에는 소 등에 씌운 멍에를 뜻하는 질매를 닮은 질매재 고개가 있다. (진성면쪽에서 바라본 월아산 질매재)

금산면 월아마을 입구에서 월아산을 넘어 진성면으로 가는 길가에는 나무들이 민낯이다. 한 달 뒤쯤 봄이 농익어갈 무렵이면 하얗게 필 2,000그루의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룰 것이다. 이 고갯길을 하얗게 물들일 그때를 떠올리니 즐겁다. 소 등에 씌운 멍에를 뜻하는 지역 사투리 질매를 닮은 고개, 질매재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질매재는 월아산 국사봉과 장군대봉 사이에 있는데 금산면과 진성면의 경계다.

▲ 질매재에서 내려다 본 진주 금산면 일대. 봄이 농익어갈 무렵이면 하얗게 필 2,000그루의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룰 것이다.

월아산을 횡단하는 달음산로로 인해 단절된 생태계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인공구조물인 생태통로 주변을 걸었다. 야생동물의 교통사고 사망(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해 주위에는 펜스가 있다. 여기에서 장군대봉까지는 2.15km, 국사봉은 0.53km다. 봉우리에 올라가면 진주를 한 눈에 오롯이 볼 수 있다. 국사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산면 안녕기원제단이 나오고 그 앞으로 산악자전거 경기코스였던 까닭에 조심하라는 빛바랜 선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 질매재에서는 장군대봉까지는 2.15km, 국사봉은 0.53km다.

질매재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 월정저수지를 지나가 동산리 삼거리 못미처 있는 월아식품 앞에서 천룡사 방향으로 오른쪽으로 좁다란 길로 들어갔다. 용고미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구름은 바람 없이 못 가고 인생은 사랑 없이 못가네’라는 현판이 붙은 ‘소담정(笑談亭)’이 나온다. 정자 옆에는 진양 정 씨의 정절을 기리는 비(貞節婦孺人晋陽鄭氏行蹟碑)가 서 있다. 정절비를 지나면 ‘용고미(龍顧尾) 함양 박씨 세거지’라는 비가 서 있다. 그 옆 오른편으로 난 길을 가면 비각이 나온다. 충직한 노비를 기리는 ‘충노비(忠奴碑)’다.

▲ 진주 용고미 마을 입구 구름은 바람 없이 못 가고 인생은 사랑 없이 못가네’라는 현판이 붙은 ‘소담정(笑談亭)’이 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는 양반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비록 조선 시대 노비 수가 전체 인구 중 최소 30%가 넘었다지만 노비를 위한 정려비는 드물다. 경남 지역에는 함안군 여항면 무진정 부근에 무작금 충노비가 있고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상발의 충노비가 있다.

▲ 함양 박씨 노비 최의남의 공을 기려 세운 정려각.

최선을 다한 노력을 기리는 정려각 안에는 가로 33㎝, 세로 73㎝, 폭 8㎝ 크기에 충노효자최의남지려(忠奴孝子崔義男之閭)라고 적힌 현판이 붙어 있다. 현판 아래에는 “충노효자최의남지비(忠奴孝子崔義男之碑)”라고 새긴 소박한 돌비가 서 있다.

『진양속지』에 따르면 “최의남은 동산리 박씨 집의 사노(私奴)였다. 그의 주인이 일찍 죽고 남은 재산이 없었다. 다만 한 고아만 있었으나 최의남은 주인집 제사를 받들어 향불이 끊이지 않게 하고, 또 주인집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며 배움을 성취하게 했다. 숙종 13년(1686년)에 이런 일이 알려지자 충노로서 정려를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이후 박씨 문중에서 노비 최의남의 공을 기려 비를 세웠다. 또한, 최의남은 주인집 아들을 매일 보살핀 까닭에 정작 자신의 늙은 어머니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자신이 주인집 아들을 섬기는 것처럼 시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한다고 처를 아홉 번이나 내쫓았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이면 함양 박씨 문중 사람들이 비각 앞에서 제사를 올린다.

▲ 정려각에는 “충노효자최의남지비(忠奴孝子崔義男之碑)”라고 새긴 소박한 돌비가 서 있다.

주인집 아들을 내 아들처럼 받들기도 어렵지만, 배우자를 아홉 번이나 내쫓기는 더더욱 어렵다. 비각을 들여다보다 맞은 편 집으로 들어갔다. 함양 박씨 13세손이라는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안 할머니 댁에 들일 나갔다가 들러 볕 잘 드는 마당 한 쪽에 앉아 이야기 중이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께서는 커피를 끓여주셨다. 마당에는 매화가 활짝 피어 봄 향기 가득했다. 할아버지께 마을 이름 ‘용고미’에 관해 여쭈자 “마을 입구 왼편에 있는 봉우리가 용머리고 비각이 있는 부근이 용 꼬리다. 용이 꼬리를 바라보는 모양새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마을 이름이 용고미라 부른다.”고 들려주신다.

▲ 조선 시대 선비 간암(艮巖) 박태형(朴泰亨) 선생이 살았던 집 마당에 핀 매화.

또한, 여기 할머니가 간암(艮巖) 박태형(朴泰亨) 선생의 며느리라고 알려주셨다. 12권 6책이라는 절대 적지 않은 문집을 남긴 조선 시대 선비였던 간암 선생은 1864년 마을에서 덕성(德成)과 진양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갔다. 이에 감복한 마을 사람들이 묘소 가는 길을 정리해주기도 했단다. 모친이 몸이 붓는 병으로 고생하자 고기가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몸소 낚시해 고기를 잡아 모친의 병을 낫게 하기도 한 효자였다. 선생은 또한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과거를 포기하고 집 근처에 ‘모노정(慕魯亭)’을 세워 제자 양성에 힘썼다. 모노정은 ‘노나라를 숭모한다는 뜻’으로 곧 공자를 숭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생의 책은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영구 위탁되었다.

▲ 충노비가 있는 진주 용고미 마을 전경. 용이 꼬리를 보는 형세를 하고 있어 용고미(龍顧尾)다.

커피와 함께 마을 이야기를 달짝지근하게 듣고 일어섰다. 덕분에 구불구불한 동네 골목을 둘러보는 걸음이 가볍다. 500년이 넘는 용고미 마을은 과거가 서려 있다. 초가와 한옥이 주는 멋스러움과 세월의 흔적은 없다. 마을은 효와 충에 관한 인간의 도리를 말없이 들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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