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에일과 라거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 신입생 환영회를 잊지 못한다. 태어나 처음, 선배가 건네 준 소주잔을 들고 ‘원샷’을 외치던 찰나, 걸걸한 목소리에 커트 머리 여자 동기가 말했다. “전, 소맥으로 마시겠습니다.”

그 순간 나에게 그 친구는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이었다. 아빠가 회식하고 늦게 들어와 엄마한테 “소맥, 딱 다섯 잔 밖에 안 마셨다.”라고 말하던 바로 그 술. 나에게 맥주란 소주의 친구이자, 소주보다 더 무서운 어른들의 술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십대 중반이 된 나는 술자리에서 맥주를 자연스럽게 시키고, 소주가 독해 맥주를 섞어 마시며 그 자리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여자 동기도 아빠도 사실은 맥주의 힘을 빌려 독한 술과 세상을 이겨보려 한 것이다.

한국 맥주는 언제나 조연이었다. 소주를 만나 ‘소맥’이 되고 치킨을 만나 ‘치맥’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밋밋한 연기로만은 시청자들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는 법. 맥주는 지금 오랜 무명생활을 접고 점점 수면 위로 떠올라 주연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나는 수제 맥주를 개성파 조연의 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롯이 자기가 가진 맛과 향만으로도 청춘들을 매료시킬 수제 맥주 ‘원탑 주연’의 세상이 도래했다.

강렬한 첫 경험, 생명력을 느끼다

000 맥주만 마시다가 처음 맛본 에일 맥주의 강렬한 맛을 잊지 못한다. 맥주의 ‘미음’ 자도 모르던 시절, 막 유학을 갔다 온 친구의 손에 이끌려 수십 가지 종류의 생맥주가 있는 펍(pub)에 가게 되었다. 어디서 귀동냥으로 들은 건 있어서 홉의 함량이 높은 맥주가 맛있는 맥주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 있게 가장 홉 많이 들어간 것으로 주문하고는 한 모금 들이켰을 때, 엄마가 수족냉증 치료를 위해 지어 준 한약을 마시는 줄 알았다.

이 때 이 맥주를 통째로 포기하면 지는 느낌이 들어 연달아 들이켰다. 첫 느낌이 사그라지고, 따라오는 신선한 꽃향기가 입안을 휘감았다. 무생물인 맥주에서 생명이 깃든 것 같은 신선함을 느꼈다.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에일의 맛에 눈에 뜬 순간은.

그래서인지 나는 수제맥주를 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독특한 맥주를 권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독특한 첫맛은 머리에서 오래 남는다. 거부감 뒤에 따라 오는 호기심은 에스프레소의 그것과는 달리 밀어내기 힘든 청량함이다.

하지만 너무 쓴 맛은 위험할 수 있어서 적당히 쓰지만 특이한 맥주를 소개하겠다. 그 이름도 생소한 ‘고제맥주’다. 고제는 옛 독일의 고슬라르지방의 맥주라는 뜻인 맥주 종류의 이름이다. 밀을 주원료로 만드는 바이스비어를 기본으로 만들되 허브, 고수, 소금 등 다른 원료를 추가하여 독창적인 맛을 낸 것을 말한다. 특이한 맥주를 맛보고 싶지만 너무 쓴 맛과 높은 도수가 싫다면 한번 도전해보자

고제는 지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맥주다. 독일에서는 ‘맥주순수령’이라고 해서 맥주에 물, 홉, 맥아, 효모 외에 다른 원료를 넣지 못하도록 만든 법이 있었다. 고제는 맥주순수령에 위배되어 양조가 금지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순수혈통의 맥주는 아닌 것이다. 맥주순수령이 없어진 이후 이 맥주는 다시 양조되기 시작했으며, 독특한 향과 맛을 추구하는 소규모 크래프트 양조장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추세이다. 그 옛날 오로지 하나의 맥주만이 허용되던 관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성이 용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제는 향이 진하고 독특한 풍미를 지녀 기존의 맥주와는 다른 맛을 자랑한다. ‘맥덕(맥주마니아)’들이라면 구미가 당길만한 것이 본래 바이스 비어 계열은 순수하고 얌전한 맛이 특징인데 여기에 짠맛과 신맛을 더했기 때문에 한 번 마시면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그 이름도 낯선 ‘한라봉고제’

한국에서는 서울 이태원의 맥파이, 부산의 갈매기브루잉 등 브루어리(brewery·양조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고제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것은 부산 광안리의 ‘갈매기 브루잉’이라는 곳에서 맛볼 수 있는 ‘한라봉고제’다. 모든 맥주를 직접 만드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은 개성이 강한 맥주를 접할 수 있다.

한라봉고제의 색깔은 연한 주황색을 띄면서 불투명하다. 입에 대면 이름처럼 한라봉향이 제일 처음 입안을 감돈다. 고제의 기본은 부드러움인데 거품과 맥주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들어온다. 탄산도 적다. 고제의 포인트는 신맛과 짠맛인데 한라봉고제의 신맛은 한라봉 과즙이 담당하고 있다. 한라봉의 신맛과 단맛, 특유의 과일향이 입안을 맴돌고 지나가면 살짝 짠맛이 돈다. 소금의 맛이다. 시고 짠 맥주라니 상상이 안 되겠지만 각각의 맛의 조화가 너무 좋아서 금방 마시게 된다. 아마 수제 맥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맥주라고 여기지 못할 만큼 특이한 맛에 놀라게 될 것이다....(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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