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유일하게 남은 산청 단성 사직단을 찾아서

여기저기 시사(時祀)를 지낸다고 주말마다 재실이며 산소 앞이 바쁜 요즘이다. 조상 신에게 제사를 지내듯 곡식신과 땅신에게도 제사를 지냈던 역사의 현장이 문득 보고 싶었다. 아침이 온전히 밝아오기 전에 역사의 시간으로 11월 28일 훌쩍 떠났다.

남 산청군 신안면 지나 단성교를 건너 오른편으로 가면 단성면사무소가 나온다. 면사무소를 지나면 옛 단성현 관아가 있던 단성초등학교가 나온다. 농협주유소 앞 사거리에서 통영대전 고속도로 단성 나들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원당으로 향했다. 길가 송엽국들이 만개한 건너편에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와 향토수호 전몰용사 위령비가 나온다.

▲ 산청 단성면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는 1919년 3월 21일 도내 장날에서 산청, 단성, 신등, 신안 등지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울렸던 독립만세의 현장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는 1919년 3월 21일 도내 장날에서 산청, 단성, 신등, 신안 등지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울렸던 독립만세의 현장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저만치 백마산이 보인다. 백마산에는 산성이 있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진주성과 인접해 여러 차례 공방전이 있었다. 왜병이 무더운 여름 침공해 왔는데 성안에 물이 부족하면 항복할 것이라 믿고 성을 포위했다. 이때 지혜로운 장수가 말 한 필을 몰아 바위 끝에 세우고 쌀을 퍼서 말 등에 뿌리자 멀리서 보기에 말 목욕 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왜적은 험준한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며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고 한다. 이때 성안의 사람들과 말이 일시에 경호강에 내달려 물을 마시자 세 치나 물이 줄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때부터 이 산성은 백마산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의 전설이 깃든 산청 백마산.

호국의 전설이 깃든 백마산이 보이는 이곳에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정신을 이어간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넋을 잠시 기렸다. 다시 원당 마을 쪽으로 차를 몰아가자 마을 입구에 구현동비가 서 있다.

▲ 평생 분수에 맞는 삶을 산 산청 선비 안분당 권규를 비롯해 청향당 이원, 원당 권문임, 송당 이광곤, 죽각 이광우, 동곡 이조, 일신당 이천경, 원당 권제, 오월당 이유함 아홉 현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후대에 세운 구현동비.

구현동비는 원당에서 동시대를 살면서 교분이 두텁고 학덕이 깊으며 충효의(忠孝義)가 높은 안분당 권규, 청향당 이원, 원당 권문임, 송당 이광곤, 죽각 이광우, 동곡 이조, 일신당 이천경, 원당 권제, 오월당 이유함 아홉 현인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후대에 세운 비다.

평생 분수에 맞는 삶을 산 산청 선비 안분당 권규는 1496년(연산 2년) 산청 단계에서 태어나 32세 때 처가가 있는 단성현 원당동으로 이주했다. 38세 때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서울에서 치러진 복시에서 낙방하자 “인간의 본분과 사업은 날마다 생활하는 도덕 중에 있는데 어찌 명성과 이익에만 마음을 쏟을 수 있겠는가?” 탄식하며 과거를 포기했다. 이후 원당에 정사를 지어 <안분(安分)>이란 편액을 달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았다. 매년 5월 5일 스승의 날에 안동 권씨, 합천 이씨, 성주 이씨 후손들이 모여 친목과 우의를 다진다고 한다. 이렇게 안분지족하며 산 권규를 비롯해 원당리에 아홉분의 어진 이들이 살아 구현동이라고 했단다.

▲ 경남 산청 단성 사직단 가는 길에는 이정표가 없어 아쉽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 오른쪽으로 길을 잡자 사직단길이라는 도로명이 나온다. 그러나 사직단 이정표는 나오지 않는다. 이미 검색을 통해 위치를 확인한 터지만 내심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노인요양시설 안내판을 따라오면 찾기 쉬울지 모른다. 노인요양시설 입구에 있는 목정 경로당 앞에 차를 세웠다. 맞은편이 경남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55호인 산청 단성 사직단이다.

▲ 경남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산청 단성 사직단.

소나무에 둘러싸인 사직단으로 계단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밟으며 올라갔다. 오른편 감나무밭에는 까치밥만 남았다. 세계 곳곳의 경작지에서 귀찮은 잡초 취급받는 까마중이 발아래에서 손톱 크기의 하얀 꽃으로 반긴다. 사직단은 3개의 섬돌로 동서북쪽으로 3층의 섬돌이 남아 있다. 북쪽의 섬돌을 밟고 올라서자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이 나온다.

▲ 조선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은 오늘날 조선호텔 정원의 하나로 남아 있다.

사직단은 이 지역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조선 왕조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져 온다. 3500년 중국 상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종묘사직은 고구려를 거쳐 한반도로 전해져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진 우리의 고유문화가 되었다. 서울에 있는 사직단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홍살문을 세우고 동쪽에는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단을, 서쪽에는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직단을 세운 데 반해 단성 사직단은 특이하게 남쪽에 신위패를 모신 1칸 건물 신실이 있다. 땅은 네모나다는 상징 때문에 사직단은 정사각형으로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사직단이 땅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는 환구단이 있었다. 둥근 형태로 만들어져 원구단이라고도 불렸다. 원은 하늘을 상징하고 네모는 땅을 상징했다(天元地方). 하늘에 드리는 제사는 중국 황제만이 올릴 수 있다는 중국의 압력에 1465년(세조 10년) 폐지되었다. 이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친 고종이 경운궁 맞은편에 환구단을 만들어 황제로 즉위했다. 현재는 조선호텔 정원처럼 남아 있다.

 

▲ 네모난 사직단 동쪽에 있는 푸르른 소나무는 마치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듯 사직단을 품은 모양새다.

네모난 사직단 동쪽에 있는 푸르른 소나무는 마치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듯 사직단을 품은 모양새다. 그 아래에 쑥부쟁이들이 보랏빛으로 빛난다. 고즈넉한 풍경에 저절로 옷깃을 여기게 한다. 마음속에서 차 한 잔 올렸다.

저 너머 서산에는 아직 달이 채 물러나지 않고 걸려 있다. 대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아침이 밝아온다. 저 아래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북녘의 지리산은 흰머리를 두르고 있다.

▲ 단성 사직단 아래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북녘의 지리산은 흰머리를 두르고 있다.

고요함이 가득한 단성 사직단에서 만난 역사의 시간은 나를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기나긴 역사의 시간을 건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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