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기념물 제225호 산청 지곡사터를 찾아서

간밤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세상은 촉촉하다. 다행히 오후에는 비가 그쳤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기 전에 저만치 가는 가을에게 인사를 해야 할 듯싶었다. 11월 22일 가을이 보고 싶었다. 직장 근처에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을 그저 걷고 싶었다. 당직 휴식 시간, 경남 산청군 산청읍에서 웅석봉 군립공원으로 향하게 했다. 산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산으로 가는 입구에서 여유롭게 걷고 싶었다.

 

▲ 한 때는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고 물방앗간이 12개나 될 정도로 큰 절로 성장해 선종(禪宗) 5대 산문의 하나였던 지곡사는 이제는 거북 머리 비석 받침대 2기와 부서진 석탑 조각, 주춧돌 등이 남겨져 있다.

읍내에서 승용차로 5분여 들어오자 내리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를 지나자 느티나무 아래 넓은 평상이 나온다. 그 옆으로 곰 조형물 음수대가 있는데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잠겨 있다. 음수대 옆으로 돌덩이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그 앞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25호 산청 지곡사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지곡사는 통일신라 시대 응진 스님이 창건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국태사였는데 고려 시대 혜월 스님과 진관 스님이 절에 머물면서 불법을 크게 떨쳐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고 물방앗간이 12개나 될 정도로 큰 절로 성장해 선종(禪宗) 5대 산문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영남의 으뜸가는 사찰이라고 평할 정도였고 교세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번성하던 절터는 이제 그나마 거북머 리 비석 받침대 하나는 개인 펜션 옆에 있다.

 

▲ 내리 저수지에서 바라본 지리산 자락은 안갯속에 잠겼다.

여기 절터의 흔적을 알려주는 안내판 주위 일대가 번성했던 지곡사터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지곡사가 있지만 1958년 중건한 것으로 옛 가람 배치와 무관하다. 옛 절터를 알려주는 무심한 돌덩이 옆에는 표고버섯 재배동이 빼곡히들어서 있다. 재배동 사이로 달걀부침 모양의 털별꽃아재비들이 소담하게 피었다.

 

▲ 웅석봉 선녀탕에서 흘러나온 물들의 맑고 단아한 물소리가 정겹다.

농익은 가을이 저수지 속에 담겼다. 저수지는 알고 있을까 화려했던 지곡사의 옛날을. 지곡사는 남명 조식 선생이 즐겨 찾은 절이다. 선생이 지곡사를 찾는 날이면 인근 선비들이 찾아와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곳이다. 또한,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는 무기제조창이었다. 1592년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이 염초(焰硝) 150근을 미리 구워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는데 염초를 구운 곳이 바로 지곡사였다. 이곳에서 조총을 제조하기도 했다.

 

▲ 옛 지곡사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즐겨 찾았던 지곡사는 동북아국제전쟁 때는 화약과 조총을 만든 무기제조창의 역할을 했다. 무심한 세월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무심한 저수지를 뒤로하고 1km 거리에 있는 선녀탕 쪽으로 걸었다. 작은 개울에 물 흘러가는 소리가 졸졸 따라온다. ‘개울 건너서 웅석봉 가는 길’ 안내판이 나온다.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웅석봉(熊石峰)은 산세가 험하다. 1,099m 꼭대기가 곰같이 생겼다는 웅석봉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먼발치의 산들은 안개에 덮여 있다. 다시 돌아 저수지를 바라보자 저수지 둑을 경계로 저너머 산이 물에 잠겨 아름다운 기하학 무늬를 만든다. 작은 개울을 건너면 지리산 둘레길이다. 개인 사유지 옆을 지나 웅석봉을 둘러가는 길인데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건넜던 개울을 다시 돌아왔다. 저만치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감이 보인다.

▲ 1958년 중건한 현재의 지곡사는 엣 지곡사와 가람 배치가 무관하다.

지곡사 축대 아래로 담쟁이들이 초록빛과 붉은빛이 뒤덮여 삭막한 콘크리트 축대벽을 감춘다. 축대 아래에서 절 쪽을 바라보자 종각 옆으로 향나무가 횃불처럼 옹골차게 서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지곡사’라는 표지석 뒤로 일주문도 없이 바로 절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 너머에 바로 산신각이다. 왼쪽 기와지붕 끝이 허물어져 있다.

▲ 지곡사 산신각 기와지붕의 암기와 수키와들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춘 모습이 정겹다.

산신각에 소원을 빈 연등 몇 개가 곱게 매달려 있다. 기와지붕의 암기와 수키와들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춘 모습이 정겹다. 지곡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산신각을 나와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 지곡사 마당 한 쪽 목련은 새로운 시절을 준비하며 하나의 우주를 담은 겨울눈을 매달고 있다.

마당 한쪽에는 목련이 겨울을 나고 있다. 잎을 다 떨군 목련은 새로운 시절을 준비하며 하나의 우주를 담은 겨울눈을 매달고 있다.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그 날을 겨울눈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우주를 품은 겨울눈들 사이로 종이 매달려있다. 이 고요한 세상을 일깨울 종소리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로 절 너머 개울은 선녀들이 목욕한 물인지 소리가 맑고 단아하다.

▲ 허리를 숙이고 나를 낮추자 부처님이 온전히 보였다.

종 옆에 있는 약수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고 고개를 들자 안개에 뒤덮은 산들이 얼핏 설핏 모습을 드러낸다.

 

▲ 산 속 붉나무들이 가는 가을의 흔적을 품었는지 붉게 불탄다.

대웅전 아래에는 작은 동자승 조형물이 무덤덤하게 있다.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구부려 계단 위를 바라보자 대자대비 부처님이 보인다. 나를 낮추자 부처님이 온전히 보였다. 부처님을 뵙고 다시 절을 나왔다. 산신각을 지나 산으로 가는데 계절을 잊은 하얀 코스모스가 바람에 춤춘다. 선녀탕으로 가는 길에 작은 저수지가 나온다. 이 역시 물을 경계로 산들이 맞대어 잠겼다. 산 속 붉나무들이 가는 가을의 흔적을 품었는지 불타는 모습이 정겹다.

 

▲ 풍경에 두 발을 내디디고 함께 걷는 이 평화로운 여유가 좋다.

옛 영화를 알 수는 없지만, 절터를 품은 숲길은 걷기 평안하다. 가까이로는 맑은 계곡 물소리가 들려주는 소리가 즐겁다. 저수지에 담기는 풍경이 아름답다. 안갯속에 잠긴 산들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좋다. 풍경에 두 발을 내디디고 함께 걷는 이 평화로운 여유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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