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막은 대통령에 도심 모인 수만 시민…목소리 전달 대신 폭도 모는 '기레기들'

국체가 민주공화국이긴 하나 건국 이래 오랫동안 '대통령'은 지체 높은 '나라님'이었다. 대통령이란 '직임'이 국민 중의 선출된 한 사람이 맡은 한시적 직분일 뿐이라는 일깨움은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거둔 수확이었다. 그러므로 대통령 된 이는 국가의 최고지도자에 부여된 '권위'는 가지되 '권위주의'에서는 벗어남이 마땅하다는 인식 또한 신선한 것이었다. 이대로 가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법전 속의 글귀가 현실로 기어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생겼었다.

그런데 '약속'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외유내강의 여성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고 나선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나빠졌다. 국민의 뜻이야 어떻건 제 주장만 넘치는 것이다. 화사하게 웃으며 내걸었던 예전의 공약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듯 어조는 단호하고 표정은 굳어있다. 웃는 모습이라곤 비행기 트랩에 올라 손 흔들 때나 코 큰 이들과 만나는 그림에서나 이따금 볼 뿐이다. '국민과의 대화'는커녕 기자들과의 대화조차 없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하고 질문을 허용치 않아도 항의하는 기자 명색은 없다. 세월호 이후 기자는 아예 '기레기'로 불리는 판국이다. 야당이라고 있는 것은 제 밥그릇 지키느라 국민 따윈 안중에도 없다.

이렇듯 들어주는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는 시민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저 멀리 농민항쟁, 형평운동이나 3·1, 4·19 이후 길바닥에서 맞고 깨지고 죽고 했던 선배들 덕에 이만큼이라도 사람값이 오른 것이다. 멈출 수 없는 빚이다. 그날, 시위대는 차벽 안에 있었다. '차벽'이란 것이 참으로 효과적인 '가둠쇠'다. 시위대를 완벽하게 에워싼지라 그 곁을 지나는 무수한 통행차량에서는 그 벽 안에 가두어진 사람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집회가 열리면 그 집회의 목적이나 주장과 열기가 대중 일반에 전달되지 않게 하려는 정부 측 대응 태도에 명확히 부합하는 처방이다. 운집 규모를 두고 섭천 쇠도 웃을 황당한 '경찰 측 추산'이 나오는 것도 그런 연유다. 

도심에 수만 명이 모여 함성을 질러도 이 나라 방송사들은 무덤덤하다. 누가 왜 시위를 하며 무엇을 주장하는지에 대한 심층보도는커녕 뉴스로 다루는 것조차 인색하다. 틈새를 비집고 나선 아프리카, 미디어몽구,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방송의 버퍼를 감내하며 현장 소식을 더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TV조선'과 '채널A'가 생중계를 하는 것이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시위 현장을 중계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벌건 자막은 '시위대 쇠파이프 휘둘러' '시위대 사다리로 경찰차 파손' 등이 겨끔내기로 올라오고 신이 난 꼴통 패널은 위수령 발동의 필요를 말한다. 이후 상황은 예상대로다. 불법 무력, 복면 쇠파이프, 차량 파손, 경찰 부상, 엄단 등이 상징어로 떠오른다. 엄청난 수압의 물대포를 맞아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백남기 씨의 중상 원인조차 '빨간 우의'가 저지른 의도된 자해라 한다. '민중총궐기'의 고갱이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그 자리에 '폭도'만 남았다.

SNS에 올라온 19일 자 뉴욕타임스(NYT) 사설을 보며 마치 송곳에 찔린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국 신문을 통해서야 뜨문뜨문 알 수 있던 시절이 재현되는 기시감이었다. NYT는 이렇게 썼다. "지난주, 수만 명의 한국인들이 두 가지의 억압적인 정부 조처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하나는 한국의 교육자들이 독립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역사 교과서를 정부가 발행하는 교과서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족벌 대기업이 노동자들을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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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는 시선은 저리도 명징한데 우리네 눈앞은 혼탁하다. 이 어이없는 퇴행의 전위에 '나쁜 전달자'가 배를 두드리고 있음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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