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방’ 터는 현재 갤러리아백화점 진주점 주차장 자리

진주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진주에서 산다. 그럼에도 아는 게 없다. ‘참, 진짜’라는 ‘에나’라는 진주지역의 표준말(?)처럼 에나 아는 게 없다. 진주의 정신.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의 진주성 1, 2차 전투와 논개의 순국, 진주농민항쟁, 형평운동 등 진주에서 일어난 굵직한 역사의 흔적 속에 드러난 진주정신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 영화 <도리화가> 포스터. ‘남 진주, 북 평양’이라는 말처럼 진주는 명기의 고장이다.

더구나 25일 개봉을 앞둔 영화 <도리화가>의 예고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영화 <도리화가>의 여자는 판소리를 할 수 없던 시대의 금기를 깨고 조선의 첫 여자 명창이 된 진채선 이야기다. 배수지가 연기한 진채선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기생집에 맡겨진 뒤 판소리의 매력에 눈을 떴다. 그렇다, ‘남 진주, 북 평양’이라는 말처럼 진주는 명기의 고장이다. 옛부터 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지로서 이 지역 문물이 모인 곳이다. 하동, 김해, 사천, 산청 등지의 만석꾼들은 가을에 추수한 뒤 겨울이면 진주 기생집에서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 진주전화국 이곳은 조선 시대 진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이고 옛 진양 군청 자리였다. 진주 목사 관사 길 건너 맞은편에 ‘진주교방’ 터가 있다. 현재 갤러리아백화점 진주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진주 기생을 찾아 12일, 진주 시내를 걸었다. 출발지는 진주전화국. 이곳은 조선 시대 진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이고 옛 진양 군청 자리였다. 진주 목사 관사 맞은편에 ‘진주교방’ 터가 있다. 현재 갤러리아백화점 진주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교방은 고려 시대 이후 기녀들을 중심으로 한 가무(歌舞)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관기(官妓)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있었다고 한다. (중략) 진주교방에서 연행되었던 진주검무, 진주포구락무, 진주교방굿거리춤, 진주한량무가 국가와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어 진주교방은 진주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는 안내판처럼 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이 흔적이 어린 곳이다.

 

▲ 진주 시내 ‘차 없는 거리’ 이곳에 진주권번터가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진주 기생은 월정화(月精花)다. 고려 시대 진주 사록(司祿) 위제만이 기생 월정화에 빠져 그의 부인이 울화병으로 그만 죽게하였다고 한다. 또한, 진주 출신으로 대제학까지 지낸 목계 강혼(1464~1519)과 기생의 로맨스도 있다. 강혼은 젊은 시절 아리따운 관기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갓 부임한 진주 목사가 기생점고할 때 기생의 소매에 적힌 강혼의 시 한 수를 보고 크게 칭찬하고 과거 공부를 권해 마침내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풍류의 흔적은 백화점 여성 전용 주차장으로 덮여 있다.

 

▲ 1930년대 진주 기생의 모습.(일본 강제점령기 엽서)

진주교방터를 지나 진주 도심으로 발길을 옮겼다.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차 없는 거리’에 이르렀다. 우리은행 진주점 뒤편에서 마침 ‘신평등 모의 유엔’을 알리는 대학생들의 선전전이 있었다. 그들 뒤로 ‘진주권번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조선 말기에 진주교방이 폐지되자 진주 관기들이 생업을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해 활동하다 1914년 진주권번을 결성해 명맥을 이어갔다.

일본 강제 점령기에 일본인이 쓴 『진주대관』에서 따르면 ‘시내 중심가인 대안동에서 진주예기 권번, 그곳은 평양에 겨룰 수 있을 만큼 규모가 대단했는데 500평가량의 큰 기와집에 넓은 마당, 대청마루, 소리, 가야금과 춤을 배우던 큰 연습방이 3개나 됐다.’고 한다.

 

▲ 진주성

조합을 결성했던 진주 기생들은 학부를 설치해 기생이 되고자 했던 아이들을 가르쳤다. 7~9세의 여자아이들이 조합에 들어갔는데 대부분 경제적 사정으로 생활에 쪼들려 기적에 올린 경우가 대다수라 한다. 기생 수습생들은 오전, 오후 진주검무와 한량무를 비롯한 가무를 시작으로 음곡, 산술, 일본어, 예법 등을 각 과목을 약 3년의 수업연한으로 배웠다. 기생인 되면 5~6년 활동하고 스무 살쯤이면 기둥서방과 살거나 결혼하는 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기생문화는 일본 강제 점령기 공창(公娼)으로 퇴락을 맞았고 해방되어서는 아예 기생의 멋과 맛을 잃어버렸다. 외화벌이를 내걸고 기생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매춘을 내세운 향락적인 기생관광으로 일본인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켰다. 진주 기생뿐 아니라 대한민국 기생과 풍류 문화는 사라졌다.

▲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진주교방터를 나와 진주성 쪽으로 걸었다. 여관과 식당 등이 밀집한 골목 사이를 지났다. 김치를 담그려는지 배추를 1톤 트럭에서 분주하게 내리는 풍경 너머로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이 보인다. 성벽에 펄럭이는 깃발보다 더 붉게 물든 나무들이 가을이 농익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각기 긴 의자에 앉아 가을 햇살을 샤워하고 있다. 저만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긴 의자에 앉아 진주성의 익어가는 가을을 구경했다.

 

▲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 장군 동상.

촉석루로 향했다. 누각 아래 남강으로 난 암문(暗門)으로 곧장 걸었다. 문을 지나자 가파른 절벽이다. 저만치 성을 따라 남강 쪽 산책로는 무척이나 평안한 풍경도 다르다. 조심조심 의암 바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암 바위 앞에는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액이 붙은 비석각이 있다.

 

▲ 의암 바위 앞에 있는 의암사적비각. 원래는 의기비-의기사-의기정려각이 촉석루 경내에 ‘<’모양으로 있었지만 일본 강제점령기에 진주성이 훼손되면서 현재 한곳에 모여 있다.

『진주성 촉석루의 숨은 내력』에 따르면 ‘원래의 논개 사적은 의기비-의기사-의기정려각이 촉석루 경내에 ‘<’모양으로 배치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의기비와 정려각이 한 공간에 있으며, 마치 두 사적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이는 공간 구성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상당히 변형되었다.’고 한다. 1722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세운 의암사적비는 촉석루 북쪽에 있었고, 1741년 우병사 신덕하가 창건한 정려각은 남강가의 언덕에 있었다. 일본 강점기, 일본인들이 의암사적비 비각을 헐어 남강가 정려각으로 이전해 통합해 기존의 ‘의기논개지문’ 내부 현판이 비각 외부로 나와 의암사적비 비각 편액으로 엉뚱하게 바뀐 것이다.

 

▲ 진주 남강과 의암 바위.

아쉽다. 비문에는 정식의 「의암사적비명」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홀로 가파른 바위에/우뚝 선 여인이여/여인이 이 바위 아니었다면/어찌 순국의 장소 되었으랴/바위가 이 여인 아니었다면/어찌 의롭다는 소리를 띠랴/한 줄기 강가 외딴 바위/만고에 꽃다운 이름이여/’

▲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

충도, 효도, 열도 아닌 ‘의기’라는 정표를 받은 이는 논개가 유일하다. 다시 촉석루로 올라왔다. 누각 밑을 지나 왼편으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로 옮겼다. 사당 앞 ‘의랑 논개의 비’를 지나 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올랐다.

 

▲ 진주성 임진 대첩 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아래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논개 순절모습.

김수업 전 경상대학교 교수의 『진주문화를 찾아서-논개』를 읽으면 논개가 의를 실천한 여인이라고 알 수 있다. 전북 장수 출신이요, 최경회의 후실, 왜장 로스케 어쩌구 하는 이를 껴안고 죽었다는 순애보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논개의 영정을 보고 다들 놀란다. 곱디고운 19살아 아니라 왜 저렇게 늙었느냐고. 논개 영정 앞에 서면 저절로 옷깃을 여기게 된다. 향을 피워 고개 숙여 논개 영혼에 고마움을 올렸다. 논개의 의로운 죽음은 진주 기생들의 자존심으로 되살아났다. 이들은 일본 강제점령기에도 논개의 넋을 기리며 의암별제를 지냈다. 비록 진주 기생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 정신과 넋을 기리지 위해 해마다 봄이면 ‘논개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의기 논개 영정.

 

사당에는 오른쪽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의 시판이 걸려있다. 왼쪽에는 진주기생 산홍의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시판이 걸려있다.

‘천년토록 의로운 진주/쌍묘에다 높은 누각 있나니/부끄러운 인생들이 한가한 날에/피리와 북소리로 너절히 노니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진주기생 산홍은 재색이 모두 빼어났다. 이지용이 천금을 주고 불러 첩으로 삼고자 하였다. 산홍은 사양하며 “세상에서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합디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이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하니, 이지용이 크게 화를 내어 두들겨 팼다.’고 한다. 논개의 후예 산홍의 절개가 느껴진다.

▲ 『사진으로 보는 한국 100년(동아일보)』 뒤줄 오른쪽부터 이지용, 이등박문, 박의문.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인 이지용은 진주 기생 산홍에게 첩이 될 것을 명했다가 오히려 산홍에게 호되게 당했다. 산홍은 그를 호되게 꾸짖으며 "내가 비록 천한 기생이오나 사람이온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비단 산홍 뿐 아니다. “젊은 장교님,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 사람이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진주성은 가을이 농익어 가고 있다.

리영희의 『대화』 중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국전쟁 중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중위라는 계급장을 단 선생은 술자리에서 자신을 거절하고 먼저 일어난 진주 기생을 찾아 나섰다. 총으로 굴복시키는 게 본업인 군인이었던 선생은 술기운에 총을 빼 들고 진주 기생 집 마당에서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라 살려달라고 애걸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주 기생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고 한다. 선생은 진심으로 사죄한 다음, 한 기생의 인격적 위대함에 깊은 절로 예의를 표한 뒤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 진주성에서 바라본 남강.

논개를 비롯해 진주 기생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길은 그렇게 끝났다. 길 끝에서 사람으로서 지키고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義)를 실천한 진주 여성들 속에서 진주 정신을 보았다. 진주 시내를 걷는 것은 더구나 진주 기생의 절개를 떠올리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진정한 용기를 생각하게 한다. 진주 기생들이 남긴 흔적은 진주 사람들의 자존심이자 상징으로 고스란히 남아 진정한 용기의 중심이 되었다.

*이 기사는 본사와 관계없이 필자들의 자유로운 기사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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