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의 <라이프오브 파이>

워낙 유명한 영화이고,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많았던 영화다.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한 청년의 표류기와 이를 재해석한, 또는 미화시킨 뱅갈 호랑이 리처드 파크와의 동거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영화의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한 꺼풀 더 깊이 들어가면 영화는 매우 철학적이고, 신앙고백적이다. 신의 존재 여부와 믿음의 본질에 대한 물음, 종교(감성)와 과학(이성) 사이의 괴리, 신성과 욕망 사이의 갈등 등이 뒤엉켜 있다.

주인공 ‘피신 물라토 파텔(파이)’이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에서 겪었던 이야기와 한 소녀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보트 위에서 겪은 뱅갈 호랑이와의 동거와 생존 투쟁.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우주를 담고 있는 크리슈나의 입’이라고 보았다. 힌두 경전에 나오는 한 토막 이야기는 영화에서 비교적 간단히 소개된다.

‘어린시절 크리슈나가 친구와 놀면서 흙을 먹는다. 친구가 이를 어머니에게 일러바쳐 어머니가 크리슈나를 야단치면서 입을 들여다보는데, 그 안에 우주가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입이었을까? 눈이나 손이 아니라 왜 입안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 했을까?

나는 이렇게 본다. 입은 욕망의 원초적인 고향이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 에너지는 성욕이며, 어린아이의 입은 모든 욕망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래서 유아기의 성적 욕망 단계를 가리켜 구강기라고 부른다.

생명체의 입은 실로 탄생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입은 온갖 먹잇감들이 하나로 뒤섞이는 장소이고, 그것들이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원으로 바뀌는 장소이기도 하다. 장자는 이 세상이 조물주가 하늘과 땅이라는 용광로에서 오만가지 만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오만가지 것들을 녹여 내는 조물주의 용광로는 다름 아닌 ‘입’이 아니겠는가.

영화 전반부에서 파이는 호랑이와 눈으로 교감을 나누며 고기를 건네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아버지에게 들켜 크게 혼나고, 눈 앞에서 양이 산채로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호랑이와 교감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아버지는 “그건 단지 호랑이 눈에 비친 너의 모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 순간 아버지가 말리지 않았다면 파이는 팔을 잃었을 것이라면서.

이 장면에서 파이가 나누었다는 호랑이와의 교감이란 기도나 참선, 교리 공부로 도달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현실 세상의 욕망과 마주쳤을 때는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리나 신의 존재, 구원, 깨달음과 같은 것은 욕망으로 뒤엉킨 물질세계와 연결돼야 하고 그 안에서 증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뱅갈 호랑이 리처드 파크는 다름 아닌 주인공 파이(피신)의 욕망이 체화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욕망이란 채워지지 않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고자 하는 생존 욕구라 할 수 있다.

파이는 바다를 한없이 표류하던 중 지도에 나오지 않는 환상의 섬에 도달한다. 미어캣만이 떼지어 살고 있는 그 섬은 흙 한줌 없이 전체가 빼곡한 식물들의 뿌리로 형성돼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한데 밤이 되면 섬의 중심에 있는 연못에서는 그 안의 모든 동물들을 흡수해서 영양분을 빨아 먹는다. 포식 식물들의 섬이었던 것이다. 파이는 밤에 식물의 열매 속에서 사람 이빨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음날 도망치듯 섬을 빠져나온다. 파이는 그곳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섬에 계속 안주해서 살았다면, 나는 그곳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섬에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고.

그런데, 여기서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환상의 섬을 탈출할 때 섬 전체의 형상이 어렴풋이 나타나는데, 바로 인간이 누워있는 모습이다. 모든 동물들을 빨아들여 멸종시키는 섬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지구상의 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키고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지구와 자신의 종까지 멸종시키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보라.

파이는 결국 욕망의 먹잇감이 되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도망친 것이다. 그런 다음 파이는 거대한 폭풍우와 맞서게 된다. 생존 욕구에 매달려 발버둥치던 파이는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폭풍우에 자신을 내맡기며 이렇게 외친다.

“신이여! 나는 사랑하는 가족도 잃고 꿈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합니까.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시라. 나는 두렵지 않다”고.

영화는 신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던져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크리슈나의 입’ 이야기와 연결 지어 보자.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내고, 운동하게 하는 원초적인 에너지는 욕망이다. 개체를 존속케 하는 식욕과 개통을 존속케 하는 성욕은 분명 세상 만물을 분화하고 영속케 하는 에너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예수)을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으로 보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듯이, 욕망으로 태어난 만물의 형상 속에서 우리는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요동치는 무섭고 화난 모습이기도 했지만, 모든 생명체를 품고 새롭게 탄생시키는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매우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호랑이 리처드 파크가 보트 끝에 홀로 앉아 무수한 별들로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장면이다. 욕망으로 들끓던 사나운 호랑이와 수많은 별과 은하수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하늘. 그 두 가지 모두에게서 우리는 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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